나의 일상은 늘 정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쓸고 닦는 일이 일상이었다면, 지금은 처분해서 없애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직장을 그만 둘 무렵, 나는 백수가 되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들을 미리 장만해 두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쓰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드시 쓰게 될 거라며 구입해 둔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쓸모가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건 그냥 가지고 싶다는 욕심에서 구입한 것이지, 필요해서 구입한 것이 아니었다.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정리해 버렸고, 그래서 지금은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처분했다.
집에 대한 애정이 식으면서 또 이사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짐을 줄였지만, 어느 순간엔 떠나기 위해 짐을 줄였다. 최소한으로 생활하다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처리할 수 있는 것들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짐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중고거래가 필수였지만 쉽사리 시작할 수는 없었다. '당신의 근처에 있다는 마켓'을 알게 되었지만,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나름 파워 블로그로 업체에서 협찬을 받기도 했었고, 혼자 쓰기엔 많아서 벼룩시장을 통해 처분하기도 했었다. 그때도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모두 만났던 경험이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두려워서 쉽사리 시작할 수 없었다.
기존에 쓰던 식기 건조대는 따로 챙겨 오지 않았는데 이사 와서 보니 설치되어 있는 식기 건조대가 작아도 너무 작아서 불편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특별한 부속품은 필요 없어서 일반형으로 구입했는데 보기에도 왠지 허술해 보이더니 큰 접시 하나를 올리자 그만 휘어져버렸다. 스테인리스라더니 약해도 너무 약했다. 그런데 요즘에 나오는 제품들이 대부분 거의 비슷했다.
투박하기는 했지만 튼튼함이 보장되었던, 예전에 제작된 제품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고 마켓에는 그런 제품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쓰겠지 하면서 마냥 가지고 있다가 방치해 둔 제품들이 많이 나와있었다. 빛바랜 박스에 담긴 제품을 보니 예전 제품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톡을 보냈다.
여름날 저녁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습했고 유독 더웠다. 집에서 3.5km 거리의 약속 장소에 걸어서 갔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가능했던 거래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구입해 온 식기 건조대는 보기에도 튼튼해 보였고, 쉽사리 휘어지지 않았다. 내가 찾던 옛날 제품을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것이 나의 첫 거래였다.
그렇게 시작한 중고 마켓에서 짐들을판매해 보기로 했다. 정리하다 보니 버리기는 아깝고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이 꽤 많았다.
내가 처음 등록한 것은 새 자전거였다. 배우려고 샀던 자전거였지만 도와주는 이가 없으니 쉽사리 탈 수도 없었고 집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처분해 버리기로 했다.
처분에 목적이 있으니 싸게라도 빨리 팔아버리고 싶었다. 새 자전거를 9만 원에 등록하자 바로 연락이 왔다. 채팅을 하는 도중에도 여러 명에게 톡이 왔다. 연락이나 올까 싶은 마음에, 처음부터 가격을 너무 저렴하게 등록했던 거였다.
가장 먼저 연락 온 이에게 팔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해 예약했다. 약속 장소에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나갔다. 자전거를 끌고 갔다가 만약 못 사겠다고 하면 다시 가지고 와야 하는데 흙이 묻은 자전거는 더 이상 방에다 보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판매가 완료되는 시점까지는 새 자전거로 유지해야 하니 끌지도 못하고 그 무거운 자전거를 들어야 했다.
바퀴에 씌워진 비닐 커버로 인해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정말로 새 자전거임을 확인한 그 사람은 저렴하게 구입한 자전거를 보고 신이 나있었다. 구입하겠다며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판매가 처음이었으니 당연히 판매자가 돈을 거슬러 주어야 하는 줄 알았다. 오만 원권 한 장을 받아 잔돈을 바꾸러 갔다.
자전거와 구매자를 남겨두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불안감이 몰려왔다. 내 손에는 오만 원이 있는데 자전거는 이미 차에 실린 상태라 그대로 가버리면 어쩌나 불안했다.
다행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고, 무사히 거래를 마칠 수 있었다.그것이 판매로는 첫 거래였다.
주로 부피가 큰 물건들부터 팔았다. 이제는 잔돈을 미리 준비해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와서 잔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직거래 장소와 약속 시간을 정하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간다. "혹시, 당근이세요?" 하고 물어보거나, 물건을 잘 보이게 들고 쭈뼛쭈뼛 온몸으로 “제가 당근입니다!” 시그널을 보낸다. 그렇게 만나서 물건을 건네주고 돈을 받으면 거래 완료였다.
하지만 이 짧은 과정 속에서도 고난은 있었다. 거래가 많아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결코 매너 좋은 사람만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구입할 의사가 없었음에도 일단 예약부터 하고 시간을 끄는 경우, 일주일 후로 약속을 잡아놓고는 그때 가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리는 경우,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서 연락하면 곧 도착해요~ 해요~ 하면서 한 시간 뒤에 나타난 경우도 있었고, 아예 잠수를 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운전석에 앉아서 트렁크 문 버튼을 누르곤 당연한 듯이 실어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늦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경우도 많았다. 운전해서 오는 경우에는 곧 도착하니 나와있으라고 했지만 막상 10분이 지나서 나타나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는 그 몇 분이 너무 힘들었다.
자기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며 갖다 달라고 하기도 하고, 직거래 장소를 설명해야지 왜 주소를 주냐고 화부터 내는 사람도 있었다. 길 찾기는 못하니 말로 설명해 달라는 사람, 찾아올 수 있다고 큰소리치더니 오는 내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비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설명해 줄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면 화를 내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에겐 정말 필요 없는 물건은 처분에 목적이 있었으니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가격에 올려두기도 했다. 고맙게 쓸 당근을 생각하며 등록하곤 했지만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몹시 당황스러운 적도 많았다.
형광 핑크 색상의 기능성 스포츠웨어 세트를 사놓았지만 입을 일이 없었다. 젊은 누군가가 예쁘게 입어주길 바라며 등록했지만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할머니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청소일을 하시는 분인데 땀이 너무 나서 기능성 웨어가 필요하셨단다. 그 순간 내가 다 안타까웠다. '이 예쁜 아이를 할머니가...' 그런데 이 분도 비닐을 열어보겠다고 했다. 하자 확인을 하려나 싶어서 그러라고 했더니 개봉해서 한참을 주물럭거렸다. 하지만 결론은 색깔이 너무 화려해서 못 사겠단다. 애초에 색깔 때문에 고민하다가 하자라도 찾아내서 거절하려던 모양이었던 거였다. 포장을 뜯기 전에 솔직히 말했으면 되었을 텐데, 트집을 잡으려다 일이 커진 경우였다.
또 한 번은 세탁을 마친 등산 배낭을 거래하러나갔다. 굳이 비닐을 벗겨서 확인을 하겠다더니 대뜸 얼룩이 많다고 깎아달라고 했다. 내가 손으로 털어내자 쉽게 털어지는 먼지였는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자기 손에 묻은 먼지를 묻히면서 얼룩을 애써 만들고 있었다. 내가 털어내자 다시 묻히기를 반복해서 거래하기 싫었던 경우도 있었지만 이미 공을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꾹 참고 거래한 적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화도 나고 짜증도 났지만 내색하면 안 되는 게 이곳의 룰이었다. 비매너 신고를 해봤자 매너온도라는 게 바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당사자는 알 수가 없었다. 거래 후기는 바로 반영되니 누가 자기에게 불만족 후기를 보냈는지, 만족 후기를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불만족 후기를 받고 만족 후기를 보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내가 만족스러운 후기를 받고 싶으면 무조건 만족 후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애초에 시간 좀 어긴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가 시간 약속을 안 지켜서 판매자가 시간 약속 항목을 빼고 후기를 보내면 똑같이 시간 약속을 안 지켰다는 보복성 후기를 보내게 되는 곳이었다.
매너 온도가 어떤 개념으로 정산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찔러보기 채팅이 많아 게시글을 삭제하려고 하면 채팅 중인 글을 삭제하면 상대방이 당황한다는 경고가 뜨는데, 그 또한 매너 온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잘못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 성향대로 반복을 하게 되고 내 매너 온도는 이유 없이 오르기도, 영문도 모르고 내려가기도 했다.
초기에는 채팅방에서 '다, 나, 까' 말투를 썼다. 그러자 왜 그렇게 말이 딱딱하냐는 지적을 받아 당황하기도 했지만, 결국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각종 이모티콘을 써가며 대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채팅방에서는 그 어떤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커피믹스 200개 한 박스를 16,000원에 등록했다. 그래도 거래가 안되어서 15,000원으로 수정했더니 구입하겠다는 톡이 왔다. 하지만 거래장소를 설명하니 멀다면서 이내 포기했다.
며칠 후, 게시글을 삭제하고 다시 등록했더니 같은 사람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멀다고 하셨다고 얘기하니 이번에는 휴가를 받았기 때문에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거래하기로 하고 약속시간을 정하려는데 3일 후에 오겠단다. 약속만 잡아놓고 당일에 취소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 또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냥 믿고 예약했다.
그런데 너무 저렴하다며, 더 없냐고 물었다. 다른 커피를 같이 구입할 테니 천 원 깎아달라고 했고 그러기로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많이 필요 없다며 하나는 취소해 버렸다. 그래도 끝까지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
거래하기로 한 당일이 되었다. 잊었을까 봐 미리 연락을 하니 30분 늦게 올 거라고 답했다. 미리 말씀 주시지 그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러나 그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결국 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났다.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자기가 잘못하고도 되려 불친절하다며 신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와서 거래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석 달이 지난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세어보니 개수가 모자라다며 환불해 달란다. 이제 와서 환불해 달라는 요구가 너무 어이없었지만 차근히 설명했다. 당시에 알려주었으면 구입처에 항의라도 해볼 텐데 이미 3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자기를 왜 속였다며 사기꾼 취급하기 시작했다. 대화로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오후 내내 끊임없는 톡이 이어졌다. 아무리 좋게 설명하고 설득해 봐도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아 결국, 고객센터에 신고했다.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비매너 거래자에서 단골로 전환한 거래자도 있었다. 중고 마켓에는 주로 구입만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99도 매너 온도를 가진 이들 중에는 자신이 갑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구입하겠다고 예약을 했지만, 오늘은 못 간다, 내일 퇴근 후 가겠다. 몇 시쯤 오겠냐고 물으면 직장인인데 시간 약속을 어떻게 미리 정하냐? 내일 다시 연락하겠다. 연락할 때까지 그냥 기다려라.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와서 너무 힘들었다. 나도 자리를 비우려면 얘기를 해야 하니 미리 약속시간을 정하자고 사정하자 그제야 시간을 지정해 주었다. 그 사람은 이후 저렴한 것을 올리면 바로 구입해 갔고 본의 아니게 단골이 되었다.
조심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동안은 고작 감정 소모 같은 일만 있었으니 중고마켓은 나에게 좋은 수단이 되었다.
경찰이 개입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새벽 1시 반에 톡이 와서 잠이 깼다. 계속 톡이 와서 잠결에 확인했는데, 톡을 읽어서 다행이라며 계속 말을 걸어왔다.식용유 가격이 한창 치솟았을 때, 스페인산 카놀라유 1L 5병을 15,000 원에 등록한 게시글에 온 톡이었다. 보육원에서 쓴다고 천 원 깎아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지금 당장 오겠다고 했다. 지금은 힘들다며 내일 오라고 거절했더니 보육원 봉사로 바빠서 지금밖에 시간이 안된다고 했다. 상대방은 여자 같았고, 현금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니 계좌이체 사기를 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10분 후에거래장소로 나갔다. 할머니와 젊은 아주머니 모녀가 함께 왔는데 또 천 원을 깎아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하니 유통기한 내에 다 못 먹을 것 같다면서 깎아주면 바로 사겠다고 했다. 빨리 처분하겠다는 마음에 이 새벽에 거래하러 나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참 황당했다.
보육원에서 쓴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니, 할 말이 없는지 은행이 없어서 돈을 못 찾아왔다고 했다. 바로 앞에 은행이 있다며 손으로 가리키니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는 어느 은행이라도 문 닫은 거 아니냐고 하니 계좌이체를 하겠다고 했다. 계좌이체 사기라도 칠 것 같은 느낌이라 지금은 입금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당근페이로 이체해 달라고 했다. 당근페이 사용자라고 떴지만 자기네는 그런 거 모른다며 그냥 계좌이체를 하겠다고 했다. 싫다고 하니 왜 계좌 이체가 안되냐고 따졌고, 현금으로 준비하기로 하지 않았냐고 하니 갑자기 자기 어머니에게 나를 가리키며 저 여자, 신용불량자인가 보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하니, 그럼 왜 계좌이체가 안되냐고 따졌다. 급기야 사기꾼이냐며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작정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시간이 아까웠지만 거래는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냥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봉지를 집어드니까 갑자기 내 손에서 뺏어갔고, 두 팔로 가슴에 끌어안고는 30분 거리에서 왔는데 그럴 수 없다며 버텼다.
여기까지 오는데 10분 걸렸다고 꼬집으니, 절대 아니라고 우기면서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온 자기네한테 어쩜 그럴 수 있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굳이 새벽에 거래하자는 요구 때문에 나는 자다가 나왔다고 항의하니 봉지를 들고 도망갔다. 쫓아가면서 돌려달라고 하니 도리어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돌려달라고 하니 왜 자꾸 따라오냐면서 나에게 스토커냐고 했다.
그 난리통에 할머니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자 딸이 저만치 앞서가면서 자기 엄마에게 빨리 오라고 독촉했다. 할머니라도 잡아야겠다 싶어서 할머니를 막아서니 그제야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13,000원을 꺼내면서 이것만 받든 지 포기하든지 선택하라고 했다.
싫다고 거절했고 물건을 돌려받기 위해 딸을 쫓아갔다. 딸이 도망가다가 카놀라유 하나를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워서 살펴보더니 갑자기 욕설을 하면서 카놀라유 5병을 전부 아스팔트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비닐이 찢어지면서 사방으로 날아갔고 한 병은 파손되었고 나머지는 통이 찌그러졌다. 나중에 보니 3병이 파손되었다. 그 상태로는 다른 사람에게 판매가 불가능했고 혼자서 다 먹기는 힘들었다.
이제는 방법이 없으니 원하는 대로 돈을 주고 가져가라고 사정하게 되었다. 딸은 계속 욕하면서 이미 구입하기 싫어졌다며 자기 엄마 손을 잡고 도망가고 있었다. 아마도 파손된 걸 아는 모양인 것 같은데 그대로 보낼 수는 없어서 계속 따라갔다.
도리어 내가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 할머니를 붙잡고 사정하고 있었다. 돈 준다고 할 때 그냥 팔지 그랬냐며 할머니는 비아냥거렸고, 딸은 자기 엄마 괴롭히지 말라면서 계속 욕을 해댔다.
계속 따라오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해서 내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전화기를 꺼내자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모녀가 고의로 새벽 시간에 거래를 하러 온 것 같았고, 자기네가 내고 싶은 만큼만 미리 현금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그럼에도 뜻대로 되지 않자 꼬투리를 잡아서 실랑이를 유도하고, 난동을 부린 것 같았다.
그렇게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파름신이 내려구입해 두었던, 처치곤란이던 물건들을 대부분 처분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는 남아있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그럼에도 내 기분에 따라 거래할 무언가는 계속 눈에 띄었다.
이제는 옷장 속에 있는 가방과 옷가지들만 남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물건은 내 손을 떠나갔다. 삶을 정리하고 싶어질 때 그러한 것들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언제든 준비된 상황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다 이제는 식재료가 타깃이 되었다. 팬트리가 채워지면 당분간은 먹고살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며칠 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 가득 차 있으면 그게 그렇게도 보기 싫었다. 미치도록 비우고 싶었다. 정말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