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고 있는 건지, 무너지고 있는 건지 구분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시간이 계속될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고 싶다가도, 어느 날은 무언가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 하나로도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해내고 싶은 마음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생겼다.
행복한 일이 생길 때마다 문득 가슴 한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이 행복은 또 얼마나 갈까 싶은... 매일 매 순간마다 죄책감, 불안감, 초조함 그런 감정들과 싸우면서 사는 게 너무도 버거웠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혼란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지금은, 더 큰 혼란만 있을 뿐이었다. 큰 것에 대한 욕심을 버렸더니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절대적인 존재였던 아버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그저 외면해야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집안의 기둥이라는 오빠에 대한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편애, 나보다어리다는 이유로남동생을 무조건 챙겨야 했던 나에게 가족은 어려서부터 모든 것에 있어서 우선이었다.
매번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꿈에서조차 가족을 위해 늘 희생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든 것이 힘들었고, 살고자 집을 떠나왔다. 돌아가지 않기 위해 잘 사는 척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방과 후에는 어머니가 아닌 내가 늘 집에 있었고, 가족의 식사를 챙겼다. 사춘기 시절의 남동생은 유독 나만잘 따랐다. 서로 표현은 서툴러도 가족 중에 그나마 친밀감이 높았던 유일한 존재였지만 그런 남동생이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 한 번 관여하기 시작하면 안쓰러움과 책임감에 내 모든 삶이 남동생 위주로 살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어떤 삶이라도 각오하고 나온 나와는 달리,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던 남동생에게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했고, 살림까지 직접 해야 했으니 벅찼던 모양이다.
남동생이 조교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닐 때 나의 원룸에 온 적이 있었다. 남동생은 친구 집에서 월세와 공과금을 내며 얹혀살고 있다고 했다. 부모님이 오빠에게 하셨듯이 당연히 남동생에게도 전세금 지원을 해주셨을 거라 생각했지만, 학비 지원에서 끝났던 모양이다. 그런 생활이 힘들어서 누나와 같이 살고 싶어서 온 분위기였다.
형편은 대기업에 다니는 오빠가 당연히 더 여유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면, 오빠는 늘 남동생에게 사소한 심부름을 시켰다. 그래서인지 남동생은 형과의 동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형보다는 누나집이 낫다는 어머니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남동생을 데리고 살라는 어머니의 압박도 있었다. 같이 살 수 있는 제대로 된 집이라도 구해주고 요구했다면 사실 나도 못 이기는 척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낡은 다세대주택 원룸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내가 성인이 된 남동생을 데리고 살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그 이후의 생활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내 상황은 최악의 상태였다. 임금이 체불되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해 거의 굶고 있었고, 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이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기당한 돈을 돌려받기 위한 재판이 진행 중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던 때였으니, 나의 그 모든 것을 가족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남동생이 안쓰러워 같이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미안한 마음에 내 신용카드를 줘서 생활비를 보태주는 걸로 애써 위안을 삼았다. 물론 그때까지도 오빠를 제외한 가족들의 휴대전화, 통신비는 내가 부담하고 있었으니 남동생은 처음엔 그 카드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동생이 아르바이트하면서 받은 돈은 내 월급의 두 배였고, 그럼에도 남동생은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으니 삶은 피폐했고 그때까지 모은 돈도 없었다.
남동생의 대학원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님이 서울에 오셨다. 부모님은 당연한 듯이 큰아들 집이 아닌 나의 원룸으로 오셔서 자고 가셨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 집을 뺏기곤 했다.
부모님에게 대학은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지만 남동생은 박사과정까지 이어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형편상 그럴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자치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만약 나와 함께 살았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동생은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모님은 생활비를 내지 않고 얹혀 지내는 남동생에게 늘 불만이었지만, 말과는 달리 출퇴근을 위해서 차부터 사주셨다.
나에게는 늘 돈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사셨던 분들이 어느 날엔 남자가 경차를 타고 다니면 여자에게 무시당한다며 남동생의 차를 중형차로 바꿔주셨다. 그때도 난 큰 불만은 없었다. 부모님의 돈으로 누구에게 무얼 사주든 그건 참견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오빠와의 차별 속에서 자랐으니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다른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 나에게만 안 되는 일이 참 많았다.
남동생이 결혼한다니까 서른다섯 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해 주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활비가 없다며, 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셨고 그래서 땅을 팔아서 쓰고 있다며 하소연하셨던 분들이었다. 혹시 딸에게도 나눠 줄 의향이 있으면 하고 욕심냈던 제주도 땅을 가장 먼저 팔아버리신 분들이었다. 그렇게 결혼에 대한 방침조차 바꾸시고 남동생에게 쏟아부으니 왠지 조금은 씁쓸했다.
그런 동생은 지금 최악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나뿐인 아들은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었고, 아내는 암투병 중이었다. 여섯 달 만에 태어난아들이일곱 달 동안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만 해도 그들 부부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때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아기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