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두 번째
산티아고 가는 길에 있었던
나의 기록 2017
나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여행을 준비하곤 한다.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되었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 과정이 참 좋았다.
또한 비행기를 타면 삶의 의지가 강해지는 것 같아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외 봉사활동은 그냥 꿈이었나 보다.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에게는 꿈이었지만 퇴사를 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오지도 좋고 꺼리는 곳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항공권을 사비로 사야 해도 괜찮았다. 그저 안전하게 잠 잘 곳만 있으면 어디든 가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겠다는데도 답은 없었다. 어차피 외국에 나가도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은 없으니 그들이 원하는 재능을 기부하고 잠시나마 머물고 싶었던 건데 장기 체류가 목적인 나의 불순한 마음이 가로막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떠났던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알베르게 봉사자, 오스삐딸레라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순례자에게 한없이 친절한 스페인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동양인에 대한 왠지 모를 차별을 종종 목격했었고 나 또한 그런 기분 나쁜 경험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차별 없는 봉사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른다. 무작정 가서 되었다는 경험담도 듣긴 했지만 내 성격으로 그렇게 무모하게 실행하기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까미노를 준비하게 되었고 걸으면서 알아보기로 했다. 이번에 그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다음번이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크고 작은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가장 힘든 여행은 아무래도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닐까 싶다. 2015년 산티아고 가는 길을 통해 까미노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그곳을 다시 가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길을 다시 준비하게 되었고 이번엔 좀 더 길어져도 무한한 자신이 있었다.
유럽 무비자 체류기간 90일에 맞추다 보니 뭔가 아쉬웠고 쉥겐조약과 상관없는 나라에서 열흘을 보내며 100일을 채우기로 했다.
유럽 배낭여행 100일.
친구가 있는 런던으로 먼저 가기로 결정했다. 경비 절감을 위해 함께 계획한 두 번째 까미노를 위해선 프랑스로 가야 했는데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너기로 했다.
파리로 가서 TGV를 타고 프랑스 남쪽으로 가야 했기에 파리를 시작으로 리옹, 니스, 루르드에서 일주일씩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도 6월 1일에 까미노를 시작하고 싶었고 첫인상이 좋았던 생장에서 며칠을 지내고 싶어서 조금 일찍 가기로 했다. 여유로운 까미노가 될 수 있게 일정에 여유를 두었고 이미 한번 다녀온 곳이니 대비도 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섣부른 자신감에 프랑스 길을 다시 걸어야 하나 고민이 되어 은의 길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처음은 힘든 것임을 잘 알기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번에는 루르드에서 시작해서 바욘, 생장을 거쳐 산티아고까지 프랑스 길을 걷고, 산티아고에서 다시 포르투갈 길을 반대로 걸어 파띠마를 거쳐 리스본으로 가기로 계획했다.
런던 인, 리스본 아웃.
그런데 런던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일주일로 줄였다. 도버해협을 유로스타 대신 메가버스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의외의 변수가 생겼다. 결국 런던에서 파리까지는 비행기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구간 항공편을 알아보니 왕복 항공권 요금이 8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직항인데도 말이다. 유럽 무비자 체류기간을 고려해 4월 25일 런던으로 출국해서 5월 1일 파리를 경유해 7월 28일 리스본에서 귀국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파리~리옹, 리옹~니스, 니스~루르드, 각 도시별로 7박 8일에 맞추어 TGV 티켓도 미리 예매했다. 90일 전에 예매를 하면 저렴한 티켓을 확보할 수가 있다.
루르드에서 까미노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운영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알베르게가 걱정되어 일단 현지에 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22일부터 31일까지 여유가 있어서 루르드에서 생장까지 걸어도 좋았고 원래 계획대로 루르드에서 일주일을 보내다 생장으로 가서 며칠을 지낸 후에 출발해도 크게 상관없었다.
생장에서 며칠을 보낼 거라 어차피 하루밖에 묵을 수 없는 공립 알베르게를 고집할 필요가 없으니 바욘에서 굳이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04.25~05.01 London
05.01~05.08 Paris
05.08~05.15 Lyon
05.15~05.22 Nice
05.22~05.29 Lourdes
05.29~06.01 Saint Jean Pied de Port
06.01~07.14 Camino de Santiago
07.14~07.17 Santiago de Compostela
07.17~07.27 Camino de Portuges
07.27~07.28 Lisbon
이번 여행은 조금 힘든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다른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첫 번째 까미노 때는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자마자 '이사'라는 변수가 생겼다. 그때는 어찌저찌 잘 넘겼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을 흔드는 일이 생기면 그냥 무너질 것 같아서 혹시 몰라 비행기 티켓 구입을 최대한 미루었다.
온전히 집중하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차분히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을 것 같아, 출발하기 석 달 전에 항공권을 구입했다.
인천~런던, 런던~파리, 리스본~인천 777,700원
1월에 티켓을 구입하고 며칠 후에 남동생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4월 출국인데 결혼식도 4월을 예상하고 있어서 날짜가 어긋나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혼식은 출국하기 일주일 전으로 잡혔다. 고향에 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컨디션이 회복될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혼은 각자 벌어서 하라는 것이 부모님의 방침이었고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을 것임을 공공연하게 밝혀오셨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오빠와 나는 집이 가장 우선순위였고 결혼 대신 집을 선택했다.
그런데 남동생은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고향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모님은 생활비를 내지 않고 얹혀 지내는 남동생에게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남동생에게 차부터 사주셨다.
돈 없다는 소리를 항상 달고 사셨던 분들이, 일 년 전엔 남자가 경차를 타고 다니면 무시당한다며 남동생의 차를 중형차로 바꿔주셨다. 그때도 난 큰 불만은 없었다. 부모님의 돈으로 누구에게 무얼 사주시든 참견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오빠와의 차별 속에서 자랐으니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가능한 일이 나는 안 되는 일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남동생이 결혼한다니까 서른다섯 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해 주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활비가 없어서 땅을 팔았다며 하소연하셨다. 도대체 땅은 언제 그렇게 구입하신 걸까? 차라리 그 돈으로 어릴 때 조금이나마 풍족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의 여유가 결코 나의 여유가 될 수 없을 거란 현실이 다가왔다. 그렇게 결혼에 대한 방침조차 바꾸시고 남동생에게 쏟아부으시니 왠지 조금은 씁쓸했다.
큰 일을 치르느라 몸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고향에서 결국 마음을 많이 다쳐서 돌아왔다. 서울에 와서도 며칠을 앓아누웠고 출발 당일 새벽까지도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여행을 연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여행을 취소하고 싶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항공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릴 적 아플 때마다 어머니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있었다. 죽더라도 학교 가서 죽어! 그래, 죽더라도 여행 가서 죽는 거다.
그렇게 다소 거친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이었다.
산티아고, 성경을 보면 일반적으로 야고보라고 불리며 라틴어로는 야코부스(Iacobus)이다. 야고(Iago), 티아고(Tiago), 산티아고(Sanctus Iacobus)라는 이름들이 유래되었다. Santiago de Zebedeo 또는 大 산티아고라도 칭하며 예수의 죽음과 피 흘림을 함께 했던 사도 중 하나이다. 어부 가족의 일원이며 예수는 동생 요한과 야고보의 타고난 과격한 성격을 빗대어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Boanergues라는 별칭을 지어주었다. 야고보 성인은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세 명의 사도 중 한 명이며 예수의 구세주적인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던 타보르 산에서 그리스도의 변모와 올리브 산에서 기도를 올릴 때 예수와 함께 있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마지막 기적과 부활 후 갈릴레아 강가에서의 알현을 목격한 증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후 열정적이고 패기가 넘쳤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가톨릭 교회의 초기 그룹의 일원으로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으며 중세 문헌에 따르면 스페인 반도, 구체적으로 북동쪽 지역으로 당시 Gallaecia라는 지역까지 왔다고 한다. 일부 이론에 따르면 스페인 수호성인인 산티아고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해안가를 따라 북유럽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론에 따르면 에브로 분지와 깐따브리아 지방의 로마의 길을 따랐다고 하며 일부에서는 현 Cartagena를 통해 스페인 반도로 들어왔으며 그의 스페인 내의 여행길은 동쪽 남부에서 서쪽의 북부 모서리까지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7명의 제자를 모은 다음 베드로 성인은 로마에서 이들을 주교로 임명하며 히스파니아에 복음 전파 임무를 맡긴다. 경외 성서에 따르면 산티아고는 예수의 다른 사도들과 함께 마리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유대인 왕인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명으로 기원 후 42년에 고문 후 참수형을 당한다. 증명되지 않은 문헌들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의 죽음 이전에 찾아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사도들과 함께 보내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예수는 기적의 출현을 통해 마리아가 직접 사도들을 불러 모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마리아는 산티아고와 7명의 사도 앞에 있던 Zaragoza의 한 기둥 표면에 나타났고 이 내용은 필라르 성모 대성당 관련 일화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일곱 사도들은 어둠이 내린 밤에 산티아고의 시신을 배에 싣고 갈리시아까지 이동해 현재 Padrón인 Iria Flavia 항구에 도착했다고 한다. 사도들은 당시에 현 꼼뽀스떼라 지역을 통치했던 다신교 여왕인 Lupa를 찾아가 산티아고의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요청하기 위해 스승의 시신을 바위 속에 넣었고 결국은 사체가 석관으로 변했다고 한다. 루빠 여왕은 막 도착한 사도들에게 오만하다고 꾸짖으며 이웃 왕국의 왕인 Duyos에게로 보냈으며 그리스도교의 적이었던 두요스 왕은 이들을 감옥에 가둔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 또는 반짝이는 불빛이 나타나 갇혀있던 사도들을 풀어주었고 도망을 가던 중 이를 쫓던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는 동안 기적이 일어나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일곱 사도들이 겪은 뜻밖의 사고들은 또 있다. 루빠 여왕이 산티아고의 시신을 이동시킬 마차를 끌 황소들을 주었는데 이 야생 황소들이 여행길에서 기적적으로 스스로 길이 들었다고 한다. 이 모든 일화를 들은 루빠 여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사도들을 받아들였으며 여왕 또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모든 켈트 족의 숭배 장소를 없애버리고 자신의 궁전 안에 산티아고의 시신을 안치하도록 하였는데 이 장소가 오늘날의 산티아고 대성당이 있는 곳이다.
8세기 후인 813년 Paio라고 불리던 성당지기가 이리아 플라비아의 주교인 Teodomiro에게 꼼뽀스떼라의 기원이 되는 장소이자 별들의 대지라는 의미인 Libredón 산에서 기이하고도 강렬하게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무성한 잡초 아래 떡갈나무 옆에서 돌 제단을 발견했으며 그 안에는 3개의 유물이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팔 아래 머리가 있는 참수형 시신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제베데오와 살로메의 아들인 산티아고가 잠들어있다, 라는 표기가 있었다. 주교는 신의 계시에 따라 유골이 산티아고와 그의 두 제자인 떼오도로, 안따나시오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발견 내용을 당시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왕이었던 알폰소 2세, 즉 Casto에게 전하며 왕은 발견 장소를 방문한 후 산티아고를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고 그의 명예를 위해 성당을 건설할 것을 명한다. 이어서 유럽 전역에 갈리시아 성인과 산티아고 성인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졌고 이는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에 큰 상징이 된다. 아스투리아스의 왕은 이후에 파도 같이 일어난 순례 행렬의 최초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사도 유해의 진위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치밀한 조사도 이루어졌다. 예수의 사도들이 산티아고 시신을 갈리시아까지 어떻게 운반했는지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도저히 믿기가 어려우며 이는 산티아고의 유해를 둘러싼 수많은 역사적 추측과 전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고고학자들은 꼼뽀스떼라가 전 기독교 시대의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것을 밝혔으나 단 한 번도 대성당 내부에 있는 유해들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적은 없으며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유해 중 이단자라고 비난을 받은 스페인 주교인 Prisciliano de Ávila의 것도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유골 관련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해가 발견되고 가톨릭 성전이 세워지고 난 후에도 유해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못했다. 구전에 의하면 1589년 5월 아 꼬루냐 항구에 정박하여 꼼뽀스떼라 시를 위협한 해적들의 도굴을 피해 산티아고의 유골을 숨겨야 했다고 한다. 산티아고 유골의 자취가 묘연해진 후 재발굴은 사도들이 지은 성당 밖에 있는 제대 뒤편 후진 안쪽에 길이 99cm, 넓이 30cm의 비밀장소에 오랜 시간 동안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아낸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1884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정식으로 두 번째 발견을 인정하였다.
산티아고의 해, 순교한 사도 산티아고의 축제일은 매년 7월 25일이며, 이 날이 일요일인 경우 산티아고의 해라고 칭한다. 이 해에 신자들은 모든 죄들로부터 완전히 용서받는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6, 5, 6, 11년을 주기로 7월 25일 산티아고 성인의 날은 일요일이다. 한 세기에 14번이 있으며 가톨릭 교회는 산티아고를 모시기 위해 산티아고 대성당을 찾아 용서를 구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전대사를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독실한 신자들은 교황의 지향에 따라 기도를 올리고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모신다. 또한 완전한 영적 면죄를 위해 산티아고 미사를 드릴 것도 권유한다. 이를 산티아고의 해 또는 꼼뽀스떼라 성인의 해라고 부르며 이는 오랜 역사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산티아고의 묘지를 찾아 영혼을 씻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기폭제라고 하겠다. 가장 최근의 산티아고의 해는 2010년이었으며 다음은 2021년이다.
산티아고의 해를 맞이하며 하루 전날인 12월 31일 오후 Puerta Santa 개막 예식을 행하는데 이는 산티아고의 대주교가 은 망치로 킨타나 광장에 위치한 대성당의 후문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세 번 치는 의식으로 까미노의 고됨을 상징한다. 이 상징을 통해 종교 권력자를 선두로 한 종교 행렬이 산티아고 사도에게 입장 허락을 구하는 것이며 이어서 벽은 허물어지게 된다. 이 입장 예식은 전통적으로 순례자들이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행하였으며 산티아고 해의 마지막 날 전까지 열두 달 내내 성당 문이 열려있으며 그 이후에는 다시 산티아고의 해가 돌아올 때까지 문이 닫혀있다. 철 격자 창으로 이루어진 뿌에르따 산따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7개의 작은 문 중에 하나이며 대성당 앞에 있는 수도원 성인인 파요 성인에게 봉헌하는 문이다. 이 문 위에는 떼오도로와 아따나시오와 함께 있는 산티아고의 조각상이 있다. 문 양 옆 쪽에는 24명의 사도, 대주교, 예언자들의 좌상이 4행 3열로 나열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글로리아 주량 현관을 건축한 마테오 장인의 작품이다. 뿌에르따 산따는 용서의 문 또는 27명의 현인의 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순례자들이 이용하는 문은 순례길의 종결과 구원의 새 삶을 상징하는 동쪽에 나 있던 본래의 뿌에르따 산따가 아니다. 살바도르 기도소를 건설하면서 문이 오른쪽으로 약간 위치가 일탈되면서 뿌에르따 산따의 상징적 의미를 잃었다. 현재의 문은 2004년 꼼뽀스떼라 출신 조각가 Suso León의 작품으로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내부의 작은 파티오로 연결된 문이다. 이 작은 파티오에 오리지널 뿌에르따 산따가 있으며 이 문을 통해 산티아고가 모셔져 있는 곳과 매우 가까운 대성당의 후진 복도로 갈 수 있다.
Villafranca del Bierzo에서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데 현재 전 세계에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장소는 5곳이며 이 중 3곳은 스페인에 있다. Santiago de Compostela, Santo Toribio de Liébana, Caravaca de la Cruz, 예루살렘, Roma가 바로 25년마다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그 다섯 곳이다. 이전에는 50년마다였으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부터 25년으로 줄었다. 이뿐만 아니라 17세기부터 산티아고의 위대한 자산 장소 중 하나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서도 병자나 순례 중 사고를 당한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비에르소의 성당에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의 해에만 문을 여는 이곳 성당의 용서의 문인 Puerta del Perdón을 통과해야 하고 100km 이상의 순례길을 마쳐야 하며 갈리시아의 수도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드려야 한다.
이런 전대사를 받기 위한 조건이 변경된 후 현재 산티아고의 해에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반드시 까미노의 일정 거리를 걸을 필요는 없으며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꼭 걸어서 도착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산티아고의 해 안에 대성당을 찾기만 하면 된다. 뿌에르따 산따를 통해 성당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며 산티아고의 해 매일 12시에 진행되는 미사에 참석해야 하나 이 두 가지 조건이 의무는 아니다. 로마 교황의 지향에 따라 기도문 한 편을 드려야 한다. (주기도문이나 사도 신경 권유)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는 당일이나 전후 15일 안에 다른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모셔야 한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 받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또는 죽은 영혼에 적용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자 여권인 끄레덴시알은 중세시대 순례자들이 증여되었던 후임장과 같은 문서이자 통행 허가증으로 순례자의 통행을 허가하고 산티아고 길에 연계되어 있는 마을들을 통과할 수 있음을 허가하는 문서였다.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에 거쳤던 숙소, 시청, 성당, 심지어 띠엔따와 바르에서 세요를 받아 가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했다는 인증서를 받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도보나 승마로 100km 이상, 자전거로는 200km 이상을 완주해야 한다.
순례자 사무소는 도보 순례자들에게 꼼뽀스떼라 획득을 위해 필요한 최소 거리를 위한 출발점을 안내해 준다. 프랑스 길의 경우는 Sarria 또는 Barbadelo, 영국의 길 경우에는 Ferrol 또는 Neda, 북쪽의 길에서는 Vilalba 또는 Baamonde, 초기의 길에서는 Lugo, 은의 길에서는 Ourense다. 이뿐만 아니라 Fisterra- Muxía 구간을 경로의 첫 번째 단계로 삼고 이후에 산티아고까지의 나머지 단계를 마치는 순례자들도 꼼뽀스떼라를 받을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도 필요한 100km를 커버할 수 있다. 프랑스 길을 선택한 자전거 이용자들이 본 인증서를 얻기 위해 최소 거리 200km를 커버할 수 있는 출발지는 Ponferrada이며 포르투갈의 길에서는 Póvoa de Varzim, 북쪽의 길에서는 Tapia de Casariego, 초기의 길을 이용할 경우에는 Grandes de Salime, 은의 길에서는 A Gudiña이다. 은의 길은 자전거 순례길 중에서 유일하게 갈리시아 내에서 시작하는 경우이다.
꼼뽀스떼라에는 떡갈나무 잎과 조가비 그림 테두리가 있으며 그 안에 라틴어로 순례자 이름을 기재하며 다음의 기도문이 쓰여 있다. '꼼뽀스떼라 대성당의 성직자 단체이자 산티아고 성인의 제단 봉인의 수호자는 이 땅의 각지에서 헌신의 마음 또는 희망 사항 또는 약속을 안고 스페인의 보호자이자 우리의 수호성인이신 산티아고 묘지까지 온 신도 또는 순례자들을 위해, 이 문서를 볼 모든 이들 앞에 다음의 내용을 인증한다. ()은 본 성지를 그리스도인의 의미 Pietatis Causa를 가지고 경건히 방문하였다. 이러한 신념 아래 본 성당의 직인을 담은 이 사증을 증여하다.'
이 인증서에는 꼼뽀스떼라 가톨릭 교회 참사회의 서기관이 서명한다. 순례자들이 일단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오브라도이로 광장 근처 Rúa do Vilar 1에 위치한 순례자 사무소에서 꼼뽀스떼라를 찾아갈 수 있다. 누구든지 꼼뽀스떼라를 신청할 수 있으며 미성년자 또한 부모님을 동반하고 자연의 성스러움과 까미노의 종교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경우라면 신청 가능하며 그룹으로도 신청 가능하다. 순례자 사무소에 따르면 미성년자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한 순례길 완주 시 순례자 이름이 적힌 특별 인증서를 받게 된다. 아기와 어린이의 경우에는 부모님이나 동반자 성인의 꼼뽀스떼라에 이름을 첨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순례자 사무소는 까미노 진행 중 세상을 떠나 꼼뽀스떼라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의 가족들을 위해 죽은 영혼들을 위한 꼼뽀스떼라를 마련하였다.
몇 해전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서 끝내지 않고 Fisterra 또는 Muxía로 순례길을 이어간다. 많은 수의 순례자들이 이 경로를 포함하는 증명서를 요구함에 따라 두 종류의 특정 인증서를 가톨릭 교회가 아닌 시청에서 발행한다. 하나는 1997년에 생긴 Fisterrana로 피스테라 숙소에서 신청할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인 Muxiana는 무시아의 관광 안내소에서 신청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2013년 7월부터 Padrón의 관광 안내소 (Avenida Compostela, s/n)와 이 지역의 공립 숙소에서 Traslatio Xacobea를 발행하는데 이 문서는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를 싣고 여행한 경로를 배로 따르는 순례자들에게 수여된다. 순례자들은 San Vicente de O Grove 항구 또는 Ribeira 항구에서 출발해야 하며 적어도 Arousa 해안의 두 시청에 정박하여 본 경로 이행을 증명하는 확인 세요를 받아야 한다. 파드론에서 마지막 확인 세요를 받을 수 있으며 증명서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파드론에서는 2010년부터 과거에 순례자들에게 발행했던 Pedronía라는 자체적 여권을 복원하며 발행하고 있다. 이로써 “o que vai a Santiago e non vai a Padrón, ou fai romería ou non” (산티아고에 가지만 파드론까지 가지 않으면 순례자가 되지 못할 수 있다)라고 하는 속담에 의미가 더 강화되었다. 본 여권은 산티아고에서 파드론까지 또는 아로우사 해안 마을 중 하나에서 Sar의 수도인 파드론까지 (바다- 강길), 또는 파드론에서 최소한 18km 떨어진 곳으로부터 순례를 한 이들에게 주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은 사르의 수도에 있는 Iria-Flavia의 산따 마리아 성당, 카르멘 다리, Santiaguiño do Monte, Pedrón과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장소들을 방문해야 한다. 순례는 도보, 자전거 또는 소형 또는 대형 선박으로 할 수 있다. 소형 선박의 경우에는 Sar 강까지, 대형 선박 이용 시에는 A Ponte의 항구까지 온 다음 마을까지는 걸어야 한다. 페드로니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파드론 시청(www.concellodepadron.org)에서 다운로드를 하여 Carta de peregrinación를 구비해야 하며 여기에 출발지부터 확인 세요를 받아야 한다. 파드론에 도착한 후 관광 안내소, 순례자 숙소, 시청 부속 건물에서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순례자 미사는 매일 낮 12시에 산티아고 대성당 대성전에서 드린다. 미사 시작 시 환영의 상징으로 지난 24시간 동안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콤포스텔라를 받은 순례자 명단을 낭독한다. 명단에는 이름과 국적, 순례 출발지가 표기되어 있다.
산티아고 성인의 해에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가장 큰 상징 중 하나인 Botafumeiro 의식을 한다. 보따푸메이로는 은도금이 된 놋쇠로 제작된 거대한 향로 (53kg, 1.5m의 높이)로 그네를 태워 밀듯이 대성당 안을 움직이는데 6명의 전문가 또는 Tiraboleiro가 필요하다. 보따푸메이로는 20m의 높이에 매달려 있으며 도드레를 이용하여 작동하며 속도는 시속 68km에 이른다.
보따푸메이로(Turibulum magnum)는 코덱스 칼릭티누스에 이미 등장하는데 성당 내에 모여든 대중들을 정화하는 요소로 사용되었다. 보따푸메이로 행사는 영성체 이후에 산티아고 사도의 성가를 바로크식 오르간으로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숯과 향을 담으면 100kg이 넘는 본 성유물은 그 오랜 역사 중 단 두어 번의 사고를 겪었다. 1499년 7월 25일 아라곤의 까딸리나 대성당에서 공중으로 날라 밖으로 나가면서 프라테리아스 광장 문에 충돌했다. 1622년에는 지탱하고 있던 줄이 끊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졌으며 20세기 들어서는 순례자 한 명이 너무 가까이 다가가 갈비뼈와 코가 부러진 적이 있다.
●Camino de Frances
프랑스 길은 다른 그 어느 경로보다도 많은 순례자가 찾는 길로 가장 전형적인 경로이다. 프랑스 길은 경치 및 예술 문화적 화려함 이외에도 다양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가장 잘 표시가 되어 있는 경로 중 하나이며 가장 광범위한 숙소 연계망을 갖추고 있다. 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기에 대체적으로 식사와 음료 공급 문제는 없다. 여름에 굉장히 많은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몰림으로써 숙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기는 하다. 따라서 숙소에 일찍 도착하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매우 이른 새벽부터 경주를 하듯이 여정길에 나서는 경우가 생긴다.
●Camino de Portugal
포르투갈 길은 두 번째로 많은 수의 순례자가 찾는 길이다. Tui를 통해 갈리시아로 들어온다.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Pontevedra와 같은 도시뿐만 아니라 Padrón, Caldas와 같은 역사 깊은 마을들과 작은 마을들을 거치면서 갈리시아를 가로지른다. 순례자들은 통행 차량이 적기는 하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많다는 불평을 하기도 한다.
●Camino de Fisterra&Muxía
피스떼라, 무시아 길은 갈리시아의 수도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떼라가 종착지가 아닌 유일한 경로이다. 대다수의 순례자들은 이 경로를 산티아고를 향한 모험의 연장선으로 이용한다. 유서 깊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12세기부터 코덱스 칼릭티누스가 본 경로 지역과 산티아고 성지 순례를 연관을 시켰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태양이 대서양의 안으로 가라앉는 동안 세상의 끝에서 옷을 불에 태우거나 오래된 신발을 없애버리는 것은 순례자들에게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될 것이다.
유럽 100일 여행 총 경비 : 2,000,000원
항공 티켓 : 777,700원
여행 경비 : 1,222,300원 (84.46£+91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