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o Camino de Santiago #4

About Reino de España

by 안녕
May 30 - July 14
in Spain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게 된 이번 여행의 핵심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두 번째 걷는 길이었다. 걷다 보면 또다시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임을 더 잘 알기에 반드시 떠나야 했다.

첫 번째 까미노를 걷고 나서 자신감이 생긴 것이 한몫을 했다. 몰라서 겪은 불편한 일은, 이제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욕심으로 힘들었던 일정은 반으로 줄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 길을 걸으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돈은 없어도 시간은 많으니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까미노를 통해, 만만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하늘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는 히말라야 등정에 맞먹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오랜 기간 준비하고 등정을 하는 이들도 날씨의 변화에 따라 물러서야 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오랜 염원이던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면 잠시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물러서야 하는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못하다 결국 목숨을 잃기도 한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게 되는 존재지만 우리는 그런 자연을 때때로 만만하게 보기도 한다. 평화로운 이면에 숨은 또 다른 자연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나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자신했던 안전한 순례길이었지만 자연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첫 번째 까미노를 다녀와선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두 번째 까미노를 다녀와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페인 왕국 (Reino de España 레이노 데 에스파냐), 약칭 스페인 (España 에스파냐)은 유럽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스페인의 영토는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져 있으며 대서양에 위치한 카나리아 제도와 지중해에 위치한 발레아레스 제도 역시 스페인 영토이다. 스페인은 세우타, 멜리야,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와 같이 아프리카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아프리카 국가와 유일하게 육지상 국경이 있는 나라이다. 알보란 해에 있는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 역시 스페인 영토이다. 스페인 본토는 동쪽과 남쪽이 지중해에 접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영국의 지브롤터만이 육지 국경이다. 북쪽의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안도라와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쪽 바다는 비스케이만이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 바다는 대서양이다.




스페인의 수도는 마드리드이고 주요 도시에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세비야, 빌바오, 말라가 등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35,000년 전 이베리아 반도에 호모 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니키아, 고대 그리스, 켈트, 카르타고 문화와 이베리아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기원전 200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히스 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독일 부족이 중앙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서고트족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정복해 스파니아라는 관구를 설치했으나 곧 서고트 왕국이 다시 이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은 우마이야 왕조의 무어인들의 공격으로 726년 멸망했고,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이 되었다. 이후 약 7세기 동안 레콩키스타가 일어나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르 왕국과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등장했으며, 1492년 이 국가들의 대부분은 가톨릭 군주라는 이름 하에 스페인으로 통합되었다.

근대 시기에 스페인은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었고 많은 문화적, 언어적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 스페인어 사용자는 약 5억 7,000만 명에 달하며, 스페인어는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되었다. 스페인 문화의 황금 시기에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등장했고 이 시기에 돈키호테가 출판되었다. 오늘날 스페인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세계 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이다.




스페인 헌법에서는 국명을 에스파냐(España)로 표기하고 있으며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정식 국명은 에스파냐 왕국(Reino de España)이다. 현재 대한민국 및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스페인(Spain)은 영어식 국명이다.

자국어 표기 및 원어 발음과 차이가 있어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에스파냐"로 표기하였으나 정착되지 못했고,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스페인 대사관"으로 호칭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자 음역인 서반아(西班牙)로도 불렸으나 21세기 들어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스페인 본토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는데 그밖에 지중해와 대서양의 제도, 두 개의 자치시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본토의 1/3 정도가 산지이며 평균 해발 고도 660미터로 고산 국가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피레네 산맥, 대서양 연안 지방에는 칸타브리아 산맥, 남부에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 중앙부에는 메세타 고원(이베리아 고원)이 있다. 과달키비르 강, 과디아나 강을 비롯해 에브로 강, 두에로 강 등이 스페인의 주요 강이다.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포도 및 오렌지, 올리브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이슬람의 지배를 오래 받아 아직도 아랍 문화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다. 스페인 본토의 동쪽을 보면 큰 섬이 몇 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요르카섬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라 불리는 이곳은 지중해에서 가장 각광받는 휴양지 중 하나이며 1950년대 스페인 정부의 관광 개발 정책에 힘입어 관광업이 계속 발전하면서 성장했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스페인령으로 모로코와 인접하는 한편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 항구인 지브롤터는 영국령이다. 비다소아 강의 작은 섬인 피센 섬은 프랑스와 공동 관리한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및 안도라 공국과 접하고 있다. 또한 피레네 근처에 있는 리비아(Llívia)라는 마을은 프랑스 영토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스페인의 영토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지중해 및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접하는 여러 무인도가 포함된다.

이베리아 반도에 속한 스페인 본토는 산악 지형이 두드러지며 산악 지형을 중심으로 고지대 평원이 분포한다. 피레네 산맥을 잇는 산지로는 칸타브리아 산맥, 시스테마 이베리코, 시스테마 센트랄, 톨레도 산맥, 시에라 모레나 등이 있으며 최고봉 3,478m인 물아센(Mulhacén)이 있는 시스테마 페니베티고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우리는 스페인 본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스페인 전 영토를 포함하여 최고봉은 카나리아 제도의 화산인 테이데이다. 메세타 고원은 스페인 중앙부에 위치한 고지대 평원이다.

주요 강으로는 에브로 강, 두에로 강, 타구스 강을 비롯해 과디아나 강,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 충적 평야는 대부분 해안가에 분포하며 과달키비르 강에 위치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충적 평야가 가장 넓고 비옥하다.




스페인의 기후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지중해성 기후는 안달루시아 평원 해안가에서 시작해서 바르셀로나와 피레네 산맥 인근까지 해안 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대륙성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과 혼재하여 나타나는 기후 특성으로 특히 마드리드를 비롯한 내륙에 나타난다.

서안 해양성 기후는 갈리시아를 비롯해 비스케이 만 근처의 해안가에 나타난다. 가장 큰 도시인 빌바오를 포함한 이 지역을 대개 Green Spain이라고 부른다.

사하라 사막이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뜨거운 바람이 넘어오는데 이 때문에 남부 지방은 상당히 건조한 기후를 띠기도 한다. 빌바오 지역을 제외한 중남부 일부에서는 반사막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사하라 사막의 바람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은 수많은 국가와 민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질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고유의 문화는 이베리아 반도 자체의 인종과 켈트족 및 서고트족의 영향에 더해 로마 가톨릭, 이슬람 문화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다고 여겨진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중앙으로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카스티야와 외부 지방 간의 긴장 내지는 다툼이 스페인 문화의 특성을 발휘하는 요인이 됐다. 최근에 와서는 스페인 문화라는 개념이 더욱더 대도시의 것으로 굳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자연적으로는 지중해와 대서양에 가까운 자연 자원이 문화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투우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로마인에게서 유래했다는 플라멩코라는 춤과 노래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다음으로 스페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많은 나라이며, 총 40개의 세계유산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 산티아고는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신약 성서의 저자인 요한의 형으로 갈릴레아 출신의 어부였다. 7월 25일이 축일인 가톨릭의 성인이며 알패오의 아들인, 또 다른 사도 야고보와 구별하여 장 야고보로도 불린다. 우리에게는 성 야고보로 불리는 성인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자 베드로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어머니인 살로메는 성모와 친척으로, 따지고 보면 성인과 예수는 인척 지간이 된다.

영어 권에서는 세인트 제임스(St. James)로, 불어 권에서는 생 자끄(Saint. Jacques)로 불리며 스페인어 권에서 산티아고(Santiago)로 불린다. 야고보 성인은 스페인의 수호성인이며 또한 니카라과와 과테말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야고보 성인은 성정이 순직하고 신심이 강했다고 성경에서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성인의 성정을 좋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한 예수는 베드로 성인과 더불어 사도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신임하고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킬 때나, 타볼 산에서 변모할 때 그리고 겟세마니 언덕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할 때 항상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 성인을 자신에게 가까이 있도록 한 것으로 볼 때 추측된다.

성인은 서기 44년 빠스카 축일 전날, 헤롯왕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되어 예수의 12제자 중에서 처음으로 순교하게 된다.

성경에는 예수의 수난의 말씀이 끝났을 때 성인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이렇게 간청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는 그가 마치 자신을 따라서 첫 번째로 순교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성인이 순교한 날도 예수가 승천한 날과 같은 성 금요일로 예수가 마신 잔을 성인도 마시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 잡은 이베리아 반도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는 땅으로 사람의 주먹처럼 생겼다. 스페인에 가톨릭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세기 중엽 로마인들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 사도 바오로를 포함한 7명의 사도들이 포교를 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스페인에 가톨릭이 알려진 것은 야고보 성인 때문이었다. 야고보 성인은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도로 복음서, 사도행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사도이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유대 땅을 떠나 머나먼 서쪽 땅으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바로 로마 제국의 속주인 이스파니아 즉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포교하려고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야고보 성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자로 만든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다고 한다. 이에 성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헤롯왕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의 스페인 전도여행에 대하여 성경에 묘사된 것은 없다. 다만 유대의 헤롯왕에 의해 기원후 44년에 처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죽음은 성 루까가 로마에서 쓴 사도행전 12장 1절과 2절에 언급되어있다.

‘헤로데 왕이 교회의 어떤 사람들에게 박해의 손을 뻗쳐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를 죽였다’

전설에 따르면 헤롯왕에 의해 처형된 야고보는 제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스페인 북서쪽으로 향해 보내졌다고 한다. 몇 명의 제자들이 그의 유해가 담긴 돌로 만든 널을 해변까지 나르자, 천사가 양 옆을 붙잡고 있는 돌로 만들어진 배가 나타나 그 널을 실었다고 한다. 이 돌로 만든 배에는 노와 돛 그리고 선원조차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 배는 일주일 동안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까지 나아갔다고 한다. 배는 풍랑을 만나고 나서 로마 시대 갈리시아 지방의 수도였던 현재의 빠드론 지역인 이리아 플라비아에 닿아 기다리던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 성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성 마르코가 베네치아에 부를 주고, 성 안드레아가 비잔틴의 위엄을 상징하듯이 성 야고보는 당시 이슬람 세계와 접하고 있던 변경 지방인 갈리시아의 수호성인에서 스페인 전체의 수호성인이 된 것이다. 당시 갈리시아는 레꽁끼스따(Reconquista : 재정복) 즉,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의 열기가 고양되던 곳이어서 성 야고보의 전설은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볼 수 있게 된다.

야고보 성인은 정치적으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주요한 명분이 된 것이다. 전설 속에서 야고보 성인은 로그로뇨 근처 ‘끌라비호 전투’에서 백마 탄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슬람 군대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이슬람교도의 앞을 막았다고 한다.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가톨릭 군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격하여 승리했다고 한다. 때문에 야고보는 평화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가진 Santiago Peregrino, 순례자 산티아고보다 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라고 많이 불린다. 현재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 시청으로 쓰고 있는 라호이 궁전에 백마를 탄 야고보 성인의 기마상이 놓이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그렇지만 용맹한 모습으로 백마를 타고 있는 성인의 모습과 발 밑에 떨어진 이슬람교도의 머리는 아이러니한 대조를 이룬다. 9세기부터 가톨릭에서는 이슬람 침략에 대항하는 방법의 하나이자 북부 스페인 사람들이 이교도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순례를 장려했다. 산티아고 순례의 홍보는 중세 마케팅의 결정체가 되었으며, 이후 순례자들의 숫자는 수백 년 동안 계속 증가했다. 특히 터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순례 여행이 위험해지자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이 예루살렘 대신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다고 한다.

1189년 마침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는 교황 알렉산더 3세에 의해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가톨릭의 성지로 선언되었다. 또한 교황은 칙령을 발표하여 산티아고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해 즉, 성스러운 해에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하는 순례자는 그동안 지은 죄를 완전히 속죄받고, 다른 해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받는다고 대사를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순례자들의 수는 12, 13세기에 가장 많이 증가되는데 이 시기에만 약 50만 정도의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걸었으며, 이때 순례 길을 따라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가톨릭의 수복이 완료된 후 순례자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고 20세기 중반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순례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쇠퇴의 길을 걷던 산티아고 순례는 198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하면서 다시 가톨릭 신자들의 대중적인 인기가 불붙기 시작한다. 또한 1987년에 EU가 까미노를 유럽의 문화유적으로 지정하고, 1993년 유네스코가 까미노를 세계문화유산에 추가하면서 순례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1997년 파울로 코엘료가 발표한 <연금술사>가 세계적인 밀리언 셀러가 되면서 소설의 배경이 된 이 순례자의 길이 젊은이들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재 대부분의 순례자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나는 루트인 까미노 프란세스를 따라 걷는다. 보통 까미노 프란세스는 피레네 산맥 발치의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출발하게 된다. 실제로 도보 순례자가 걷게 되는 거리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800km이며 피스떼라까지는 929km에 달한다. 장거리 도보 순례인 만큼 개인차에 따라 짧게는 30일 길게는 40일이 걸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순례자들은 이 길의 일부분을 몇 년에 나누어 걷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있는 순례 사무국에서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마지막 100km 이상을 걸은 순례자에게 Compostela, 순례 완료 증서를 주고 있다. 순례자 수는 야고보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성스러운 해에 절정에 이룬다. 지난 희년인 2010년에는 27만 명이 넘는 순례자가 이 길을 걸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했다.

10세기의 순례자들은 대성당의 은으로 만들어진 상자에 담겨있는 야고보 성인의 유골에 기도를 올리기 위해 강도와 늑대들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 험한 순례 길을 걸었다. 또한 야고보 성인의 전설이 있기 이전 고대 켈트 족도 은하수를 따라 비아 락테스(Via Lactes)라고 불리는 이 길을 태양이 지는 피스떼라의 태양신전을 향해 걸었다. 당시 피스떼라는 세상의 끝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람들이 육로로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었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와 피스떼라까지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도보로 순례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잠든 성스러운 도시까지의 순례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걷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휴식을 원해서 또는 좀 더 단순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순례 길에 참여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여행, 특히 장기간의 도보여행에는 어느 정도 위험요소가 따르게 된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여행의 첫 번째 원칙 ‘조심’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안전하다. 만일을 위해서 모든 순례자들에게는 공항에서나 떠나기 전 어디에서나 기일에 맞춘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순례자들이 지나는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들은 대부분 순례자들로부터 나오는 유로화가 수입의 한 축을 차지하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하다. 그렇지만 순례자들은 까미노를 걸으면서 몇 군데 대도시를 거치게 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대도시에서는 구걸을 하는 걸인도, 소매치기도 혹은 강도나 도둑도 있다. 대도시에서는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또한 순례자들은 교통사고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순례자들이 지나는 길은 대부분 차들이 많지 않은 비포장 시골길이다. 도시에 들어서면 순례자는 소음과 혼란에 당황해서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지만 주의를 하되 불안에 떨 필요는 전혀 없다. 중세의 까미노는 순례자를 노리는 도둑과 강도, 통행세를 받으려는 영주들과 욕심 많은 여관 주인 그리고 늑대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까미노에는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목동과 호기심 많은 아이들 그리고 순례자에게 간식과 물을 건네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만약 길을 가다 신변의 문제가 생기면 침착하게 주위에 있는 현지인이나 동료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중세에 순례자를 지키던 백마 탄 템플 기사단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까미노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예상하지 못한 영적 체험을 한 순례자는 차고도 넘친다.

중세시대부터 있던 늑대는 아직도 순례자들에게 문젯거리다. 시골길에서 마주치는 목줄 풀린 늑대를 닮은 개들이 있다. 보통은 온순하나 가끔씩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세워야 한다. 도망가지 말고 조용히, 눈을 마주치지 말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무로 만든 튼튼한 순례자용 지팡이나 등반용 스틱을 가져가기를 권해 드린다. 또 다른 늑대는 젊은 여성 순례자에게 접근하는 스패니쉬 마초, 과도한 스킨십을 해오는 노인, 동료 남성 순례자들이다. 보통 이런 젊은 외국 남성들의 행동은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까미노에서 만나 짧은 연인이 되는 남녀를 종종 보게 되기도 한다. 지나친 과민 반응은 자신의 순례 길을 더욱 지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중세부터 까미노에는 순례자의 지갑을 노리는 술집이 있었고 아직도 대도시와 일부 시골 마을에는 남성 순례자를 유혹하는 야릇한 술집이 성업 중이다. 까미노에서의 호기심은 길 자체와 그 길을 걷는 자신에게만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매일 밤 와인의 달콤한 유혹을 적당한 선에서 뿌리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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