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세상에 보내는 공개 유언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변화될 것이다. 역사의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중략)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p15-16
'마지막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는 스테판 에셀, 그는 누구인가.
간단하지 않은 삶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말하자면 샤르트르의 후배이며, 나치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뒤 '되찾은 삶을 걸고 자유와 평등을 실행하고자' 세계 인권 선언을 작성한 외교관이자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이다.
동시에 분노의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라고 말하며 앙가주망(Engagement)을 실천하는 회의론자이다. 사르트르의 후배였음을 증명하듯 그는 우리에게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하며 절대자유주의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는 그의 말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분노해야 할까?
두 가지 커다란 도전, 빈부격차와 인권.
그 어느 때 보다도 상호의존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는 빈부격차와 인권, 2가지를 꼽는다. 극빈층과 부유층 사이의 장벽은 20세기 이후 점차 심해지고 있으며 이미 20:80의 파레토 법칙 조차도 무너져 5:95의 새로운 법칙이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모든 개인은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고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정당히 누리지 못한다면 주저 없이 분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부격차와 인권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분노해야 할 우리 젊은이들은 '마취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어 안정감을 선택하는 대신 분노를 다음 세대에 양보하고 살아간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 '분노를 단념하지 않아야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가?
분노하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샤르트르는 분노의 방법에 대하여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수긍한다. 하지만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중략) 그렇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다'는 말을 통해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발언(샤르트르의 성향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을 하였다. 하지만 스테판 에셀은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이다' 라며 조금 다른 입장을 보인다.
즉 비폭력이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효과성의 문제이다. 다행히도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은 우리에게 비폭력의 효과성을 입증해 주었으며 빈 라덴, 나치는 폭력의 비 효과성을 입증해 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부당함이든 평화적인 방법으로 분노하라.
혼자서 분노하든, 인권단체인 앰네스티,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아동 구호 단체인 유니세프, 혹은 회사의 노동조합과 함께 하든, 그 수단이 평화적이라면 인간의 정당한 권리에 대해서만큼은 타협하지 말고 분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