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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용남 Feb 01. 2017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조화로움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철학가 버트런트 러셀의 책 이름 중 하나다.

단순해 보이는 이 한 문장에 많은 전율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한 삶이 아닌 '무엇을 볼 것인가' 내지 '무엇을 봤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라는 사고를 갖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성공사례 속에 파묻혀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실패사례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기반으로 더 큰 성공을 하기 위함일 뿐 실패 자체에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가령, '스타트업 몇 년 하며 느낀 것들'류의 글들을 보면, 막상 자신의 생각과 달랐던 스타트업 문화에 대한 내용들, 그를 통해 더 열심히 일하겠다던지, 또는 이제 이런 곳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다짐들이 담겨있다. 나는 그러한 글이 아닌 단순히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한 글을 적어보려 한다.


3년간 뼈저리게 느껴온 점은 창업 이후의 생존 자체가 하루하루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창업 후 5년 이후 살아남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망한다. 정부나 언론은 이런 망하는 기업의 통계를 보도하며 데스밸리에서 살아남는 기업을 늘려야 한다던가, 정책적인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인생을 봐도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고 조금 불행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다. 사업에만 죽음의 계곡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둘러싼 많은 요소에서 죽음의 계곡은 존재한다.


성공한 기업가인 잭 마윈도 가정을 돌보는데 소홀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시간이 되돌려진다면 가정에 충실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어느 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나 기업 또한 또 다른 측면에서는 죽음의 계곡이라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굴복하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일들, 가령 사업, 사랑, 우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죽음의 계곡을 건너고 있다. 사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뿐이다. 그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서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정자였을 때의 태초의 그 상태 말이다. 


모든 위인들도 태초엔 우리와 똑같이 생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 그림과 같이 정자가 난자를 향해 여행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정자는 난자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균이 그러하듯 무작위로 움직이며, 소수의 정자만이 난자를 향해 나팔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즉, 모든 정자는 난자를 만나 수정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움직이지 않는다. 


소수의 정자가 난자를 향해 헤엄칠 때, 자궁의 산성으로 인해 수많은 정자가 그 목숨을 잃는다. 죽음의 계곡 앞에서 좌절하는 사업체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점을 잊고 있다. 산성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정자들은 자궁 내 산도를 중화시켜서 다른 정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수정이라는 큰 사명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이 죽어버린 정자들의 최종 역할인 셈이다. 


결국 나팔관이라는 50% 확률의 죽음의 계곡까지도 무사히 건넌 정자는 난자와 만나고 난자는 가장 먼저 도착한 정자 외에 다른 정자는 들어올 수 없게 두꺼운 장막을 친다. 난자에 뒤늦게 도착한 정자들은 길어야 1주일을 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제야 수억 마리 정자들의 여행은 끝나게 된다. 


정자의 여행이 끝나는 장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치열한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체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죽어간 정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경험한 이런 자연의 섭리이자 우주의 섭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경쟁' 속에서 시작된 우리는 평생을 크고 작은 '경쟁'속에서 살아간다. 단순히 '공부'라는 유년기의 공통적인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다른 힘을 과시하며 세상에 기여한다. 


내가 사업을 하며 본 것 또한 마찬가지다. 실패하는 기업이 있다면 성공하는 기업이 있고, 실패하는 기업 또한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며 최종적으로 인류가 달성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기여한다. 정자가 난자를 만나 인간이 되겠다는 명확하게 계산된 목표를 갖지 못했듯, 우리 또한 그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결국은 모든 생명체가 의미 있듯, 해당 생명체가 저지르는 모든 움직임 또한 세상과 우주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사업을 저지르는 사람의 인터뷰나 칼럼을 보고 누군가는 크게 영향을 받아 자신 또한 도전의 대열에 합류할지도 모른다. 막상 칼럼을 쓴 사람은 실패할지라도, 그 칼럼을 통해 사업한 사람이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우리는 '나'라는 개인을 위해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실패'라는 단어는 자신을 기준으로 쓰인 단어다. '나'를 정자로 바라보면 내가 저지르는 모든 일에는 실패라는 단어 대신 '희생'이라는 단어만이 남는다. 나의 실패는 다른 정자의 성공을 의미하고 우리는 그 공통의 성공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정자가 그러했듯, 우리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합리화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 여러 가지 자기계발, 자아성찰의 개념적인 모형이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실패한 기업가의 도전은 그 자체로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 기업가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분명 어딘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세상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고, 운동을 잘하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얼굴이 멋진 사람,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행동이 빠른 사람, 눈치가 빠른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얼마 전 크게 영감을 받은 선어다. 산은 산으로서, 물은 문으로서 그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로, 산은 물에게 '산이 되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물은 산에게 '물이 되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는 산과 물이 각각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실패'라는 단어에 연연하며 '실패'를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자연의 조화를 깨버리는 일이다. '나'의 성공은 세상이 '나'라는 개인에게 당연하게 쥐어준 권리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인류사회를 만들었듯,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가정, 우리의 행복 등 모든 측면에서 조화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을 이끌고 인류 발전을 향한 거시적인 비전을 갖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 사업가들은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정자처럼 우직하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정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정자 또한 실패하여 다른 정자를 위해 길을 내어준다. 우리 또한 '성공'이라는 단어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닌 그 과정 자체에서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기여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성공은 내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세상에 영향을 어떤 식으로 미치는 것쯤이야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진하되 탐닉하지 않고, 추진력 있게 나아가되 좌절하고 무너져선 안된다는 것이 내가 본 가장 중요한 교훈인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다. 성공한 사람들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 또한, 우리의 모체가 되는 정자가 난자를 헤엄쳐갈 때 쓰러지고 죽어가며 길을 내줬던 동료 정자들이 가진 사명감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이다.


못 가진 것을 탓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이미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하루하루 정진하며 사는 것 만이 인생을 살고 사업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싶다. 틀리면 어떠한가, 우리의 여정의 과정이 가치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자연의 섭리에 기여하고 조화로운 인류사회에 기여한 것인데 말이다.


나 같은 경우는 인간으로 태어난 나의 존재의 이유와 자연의 섭리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떠오르면 그것을 우리 회사에서 만든 툴인 비캔버스에 빠르게 기록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 정제하여 블로그나 SNS 공유함으로써 내가 느낀 깨달음을 세상에 아낌없이 기여하고 있다. 


다들 수첩 또는 비캔버스를 꺼내 들고 '내가 무엇을 향해 헤엄쳐가는가. 대체 이 험난한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써보자. '정자는 죽어서 자궁 내 산도를 낮추는데 기여라도 했지, 우리의 실패는 대체 어디에 기여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때다.


어떤 정자도 '나는 난자를 위해 헤엄쳐갈 거야. 그래서 난 인간으로 변해서 나중에 공무원이 될 거야' 따위의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 우리는 좀 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났으니, 이러한 우리의 삶의 이유에 대해(사업을 한다면 사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만 한다.


사업은 그 자체로 '수정'또는 '착상'이 아닌 '헤엄'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 거대한 이유인 '수정' 또는 '착상'의 개념을 미리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패하더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반드시 생각해보자.


안 태어났어도, 태어났어도 우리의 삶은 참으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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