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손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이유
나는 여전히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인간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은 내게 사그라들지 않는 불씨를 닮았다. 꺼질 듯하면서 계속 내 안에 타고 있는 용광로랄까. 이전에는 온라인에서 블로그를 일기장 삼아 여러 가지 것들을 토해내듯이 기록했다. 병적으로 집착했던 듯싶다.
요즘에는 온라인에 쓰는 행위를 절제하고 있다. 온라인에 나누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는 손으로 기록하는 내 노트에 있다. 디지털세상에서 손으로 기억한다. 편리한 디지털도구가 생산성을 높여준다고 하지만 감각적인 면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으로 감각한다. 나는 감각이 더 날카로워졌으면 좋겠다. 네가 보지 못하는 걸 글로 구현해주고 싶다.
20대 때, 극작과 은혜 언니는 시집을 습관처럼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데 시간이 꽤 흐른 후에 은혜 언니가 시집을 읽은 이유를 알겠다. 매달 시집을 친구와 읽으면서 쓰기의 감각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서 쓰고 싶은 욕망을 차곡차곡 원기옥을 모으듯이 쌓아간다.
도피하듯이 텍스트로 도망쳤던 시간들. 시인의 언어에서 '현재, 지금, 여기, 본질'을 향한 감각을 배운다. 현재 그 찰나를 시어로 표현하는 시인의 탁월하다 못해 완벽함에 전율한다. 시쓰기는 꼭 배워보고 싶다.
시집에서만 열리는 감각을 느끼진 않는다. 클래식 음악,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감각을 더 날카롭고 무디지 않게 칼날을 갈고 있다.
하지만 감각은 언어화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 안에 기준이 있다. 그걸 다른 사람들도 동의할 언어로 구현해내는 게 숙제다.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바꿔주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라 그동안 텍스트로 눈으로 봤던 감각을 따를 뿐이다. 그래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걸 또 하고 있다. 감정적으로는 괴롭다. 내가 타인의 글을 재단할 능력이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초고는 대부분 쓰레기라서, 거의 다 뜯어고친다. 왜 그렇게 고쳤는지 질문하면 특별한 언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표현이 안된다. 아이러니다.
2주 정도 출퇴근 도장을 찍은 회사에 팀장이 왔다. 다른 부서 팀장이 "이제 팀장님 와서 좋겠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내 뇌는 버퍼링이 걸리면서 그가 원하는 피드백을 하지 못했다. 업무적으로 좋지 않다. 그래서 버벅거리는 인간처럼 굴었다. 어쩔 수 없다. 안되는 걸 된다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말로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말로는 뭐든지 쉽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고 말하면 된다. 막상 당사자는 그렇지 않은 게 문제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뭐든지 쉽지? 그런 류의 사람은 늘 신기하다.
'아'와 '어'는 다르다. 나와 드디어 온 팀장의 언어와 사고체계도 그랬다. 생각보다 잘 안맞았다. 대화가 안통하는 느낌이다. 기우인가. 우리가 평행선을 걷게 될까.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답이 나왔네.
새 회사에서 쓰는 역할을 기대했는데 전에 퇴사한 팀장이 쌓아두고 간 세금계산서, 견적서, 비교견적서, 통장사본, 사업자등록증으로 상신 업무만 매일 하는 기분이다. 지루한 작업이다. 현금영수증만 정해진 양식에 쓰면 돈 처리가 됐던 회사들만 일해봐서 낯설고 오지게 어렵다. 무슨 시간을 그렇게 많이 잡아먹는지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괴리감이 크다.
10명의 외부작가 계약서 처리는 언제 끝날까. 딱 1명 남았다. 곧 올라간다. 지출결의서.
새로운 타깃 독자로 중장년이 주어졌다.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결국 감각(센스)의 문제다. 왜 글을 쓰면서도 잘 쓰고 싶은지 이유도 달라졌다. 쓰고 싶은 이유가 늘 외부로 향해 있던 나는 이제야 내 안을 보고 본질을 꿰뚫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걸 정리했다.
타인의 본질을 꿰뚫는 글. 그건 감각으로만 만질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