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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애희 Sep 25. 2024

핑키의 우산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_ Untitled, 2018

핑키의 우산


"핑키야! 우산 가져가야지!"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엄마가 우산을 챙겨주셨다.

"그냥 가도 되는데~" 볼멘소리를 내며 우산을 건네받았다.      


사실 난 이 우산이 싫다.      


흙탕물 같은 똥색 우산, 못 생긴 이 우산이 싫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가니, 봄비가 세차게 내렸다. 어쩔 수 없이 똥색 우산을 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등굣길을 나섰다.     


여기는 부처초등학교 4학년 3반.


핑키는 나를 탈탈 털어, 핑크색 우산 보관함 안에 넣고 쪼르르 친구들에게 갔다.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_Untitled, 2018

보관함 속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있었다.

다들 학교 가는 길에 만난 세찬 봄비로 젖은 몸을 말리느라 바빴다.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은 친구들 손 등에 파란 물방울 자국으로 남아있었다.


"딩동댕동~" 1교시 수업 종이 울리자 시끌벅적 했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교실 안 분위기와 달리 핑크색 우산 보관함 안은 이제야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뽐내기 좋아하는 보라 우산이 옆 친구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붙임성 좋은 초록 우산이 보라 우산을 바라보았다.

"안녕, 어! 너 저번에 백화점에서 만났던 보라색 우산이구나!"

민들레 꽃잎을 달고 온 빨강 우산은 곧 들어오려는 친구를 위해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내가 비켜줄게. 이쪽으로 들어와."      


보관함 속 우산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금방 친해졌다.     


핑키의 흙탕물색 아니 똥색 우산만 빼고······.     


"얘들아, 안녕!"

아무도 바라보지 않았다.     

"얘들아, 나 진짜 재밌어. 봐볼래? 이렇게 얼굴을 변신시킬 수도 있어."

"얘들아, 내가 음악 연주 해줄게." 변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신나게 연주를 했다.     


솔솔~파 미미미 레미파솔미

파파파미 레레라 솔솔미레도

레레레레 미미미미 솔솔미라솔~

도~라도 라솔미도 레도레미라솔

    라라솔 도라솔미 레레레미도~     


똥색 우산의 얼굴 변신에도, 피아노 연주에도 다른 우산들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핑크색 우산 보관함에는 화려하고 깔끔한 우산들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똥색 우산은 기분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내 기운을 차리고 주머니 속에서 재미있는 책을 꺼냈다.     


'그래! 난 나만의 세상을 찾아갈 거야.‘

'너희들은 모르는 재미있는 세상으로 나는 떠날 거야.'      


똥색 우산은 책을 읽으며, 혼자 깔깔 웃었다. 잠시 후에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우아하게 대화를 하던 친구들이 힐끔거리며 똥색 우산을 바라보았다.

똥색 우산은 친구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상상 속 세상에서 웃고 울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초록 우산이 똥색 우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똥색 우산! 무슨 책이야?"

"이 책은 요새 핑키가 재미나게 보는 <대단한 4학년>이야."

이번에는 보라 우산이 묻었다.

"대단한 4학년? 무슨 내용이야? 주인공이 누군데?"

"내용을 알려주면 시시하지~~" 똥색 우산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민들레 꽃잎을 달고 온 빨강 우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던 똥색 우산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개랑 마주친 적 있니? 음······, 수영해 본 적 있니?"

똥색 우산의 질문에 모두들 눈만 껌뻑 껌뻑했다.

"개도 무서워하고, 캄캄한 방도 무서워하고, 거미도 무서워하고, 물도 무서워서 수영도 못하는 친구가 시골에 갔대. 그런데 시골 아이들한테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큰소리치기' 작전을 시작 한 거지."      


우산 친구들은 모두 똥색 우산의 책 이야기에 쏙 빠졌다.

"음······, 그다음은~~~ 내가 다 알려주면 재미없지!!"

"뭐야~~ 더 궁금하잖아!"

"나도 궁금해!"

"똥색 우산아! 아니! 땅의 기운 우산아! 책 다 읽으면, 나 빌려줄 수 있어?"


어느새 똥색 우산은 '땅 우산(땅의 기운 우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 우산은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 우산으로 통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4학년 3반 핑크색 우산함 속에서는 신비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땅 우산의 이야기에 모든 우산 친구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하하 호호 낄낄 웃는 소리, 꺅! 억! 헉! 놀라는 소리, 흑흑흑 흐느끼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들린다.      


오늘처럼 벚꽃 향기 가득한 봄비가 내리는 날, 핑크색 우산함에서 어떤 소리가 들릴까요?          



# 마음을 열게 하는 그림

그림을 보자마자 내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록달록한 색깔 속에서 파란색에 눈길이 머물던 나는 구부러진 모습으로 표현된 발이

우산 손잡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색과 선을 보며 즐거움을 느꼈던 그림은 나에게 새로운 궁금증을 안겨주었다.

바로 그림 속 주인공들의 시선, 그것은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주는 듯했다.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에게 시선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과 선은 무얼 표현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1990년대 후반 ‘공상과학 표현주의(Science-Fiction Expressionism)’라 작가가

직접 명명한 회화 스타일 가진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는

작년에 <더페이 갤러리>에서 첫 한국 개인전 <André Butzer>을 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작가의 전시가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의 인터뷰 글을 찾아 읽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본인의 그림 앞에서 안드레 부처는 웃어본 적이 ‘전혀’ 없다.

그저 인물의 눈동자만 따라갈 뿐이다.”

     

“그들은 다른 어떤 곳을 바라본다. 시선은 유토피아적이고 순수하다. 아까 말한 진실과도 연결된다.

그들의 눈이 닿은 곳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내가 그린 방랑자(눈이 비어 있고 이빨이 있는 외계인의 형상)는 정면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눈이 멀었기 때문에 무얼 보는지는 알 길이 없다.”     


“캔버스 위에는 오직 컬러뿐이다. 다만 홀로 있지 않고 다른 색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컬러가 섞여 그림이 된다. 컬러가 풍부할수록 좋은 그림이 된다.

최대한 다양한 컬러를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색과 색 간의 관계가 풍부할수록 좋다는 뜻이다.

그 관계가 끊기면 죽은 색이 되고, 죽은 그림이 된다. 그루브와 운율이 사라진다. 심장박동과도 비슷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몬드리안이다.

그의 그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올곧다고 생각하던 선이 사실은 비뚤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선이 천천히 움직이고, 또 춤추는 게 보인다.

몬드리안은 관계 속에 있는 컬러를 활용해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거장이었다.

끊임없이 재생되지만, 절대 반복되진 않는 음악.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난 사각형이라는 것을 그려본 적 없다. 진실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사각형이란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성주의의 일부다.

엔지니어, 건축가, 선생님, 특히 어린아이에겐 어느 한 시기에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올바른 측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도 고정된 상태로 있을 순 없다.”


-보그아트 황혜원·안건호(2023.12.02.)에서 발췌     


인터뷰 내용 중 "그들의 눈이 닿는 곳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색과 색간의 관계, 그루브와 운율",

"난 사각형이라는 것을 그려본 적 없다, 어떤 사물도 고정된 상태로 있을 순 없다."라는 내용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의 작품을 바라보며, 그들의 눈이 닿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들을 보며 그루브와 운율을 느꼈다.

그의 작품이 내 마음을 열어주었고, 나는 이렇게 <핑키의 우산>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 땅의 기운 우산처럼

거실에서 잠시 그림을 그리다가 숲과 강, 호수를 보러 떠나기도 하고,  쓰레기를 주우러 나가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하고, 아이들이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하며,

시간이 남으면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는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그때도 그림을 그릴 거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 생이란 존재한다. 하지만 다음 생에도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다.

부활, 환생에 대한 이론은 반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형식만 반복될 뿐, 모두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다음 생에는 산만 타면서 살지도 모른다.

아니면 프레첼을 만들 거다.

프레첼은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으니까.”


-보그아트 by황혜원·안건호(2023.12.02) 발췌    


어떻게 보면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프레첼처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의미 있게 지내고 싶다.

누군가에게 좌지우지되는 인생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삶이 되기를 바라본다.      

"땅의 기운 우산"처럼 흔들리는 인생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안드레부처 #독일작가 #André Butzer  #동화처럼 #그림보기 #글쓰기 #동화되다 #자존감 #독서의즐거움 #상상속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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