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찾기

스키장

by 귀유니

진우를 처음 만난 건 2010년 3월의 겨울, 스물 다섯이 되던해 스키장에서였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아빠를 따라다니며 매년 겨울이면 스키를 탔다. 차디찬 눈 위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서며 설산의 정상에서 내려올 때면 이 세상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엄마가 입혀준 겹겹의 내복과 스키복, 아빠가 완전 무장시켜 준 헬멧과 보호대를 몸에 지니고 있노라면 그 뜨거운 마음들로 영하의 날씨에도 춥지 않았다. 나는 그 누구보다 스스로의 감각을 믿었고 넘어지는 법을 알았으며 정상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완주를 했을 때의 쾌감은 그 어떤 자극보다 짜릿했다. 그래서인지 겨울이 되면 언제나 스키장으로 향했다. 뜨거운 마음과 차가운 쾌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니까. 어느샌가부터 늘 함께했던 부모님은 뼈가시리다며 더 이상 스키장을 찾지 않았다. 세월의 야속함에 슬프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매년 12월이면 엄마는 여전히 폭닥폭닥한 스키복을 준비해 주었고, 아빠는 스키에 정성스럽게 왁스를 칠해주었다. 언제나 뜨거운 마음을 가득 안고 차가운 스키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도 없이 갔던 스키장이었는데 그날따라 엉망진창이었다. 스물다섯이나 되었으니 혼자 스키장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고 잡은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연말연시 몰아치는 업무를 쳐내고 간신히 잡은 이번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스키장 방문이었다. 때늦은 폭설로 서울에서 평창까지 6시간이나 걸렸다. 리조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점심을 훌쩍 지나고 있었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서둘러 장비를 둘러매고 매표소로 향했다. 일찍 도착해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오전, 오후 스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로지 빨리 스키를 탈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지갑, 핸드폰 모두 차에 두고 온 사실을 리프트권을 구매하다가 깨달았다. 이미 다 갈아입어버린 스키복으로 부대끼는 몸을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은 왜 이렇게 넓은 건지, 세상은 왜 아직도 지문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건지 쓸데없는 불평을 하며 세찬 바람 때문에 가로로 흩날리는 눈보라를 헤치며 어기적 어기적 걸었다. 주차한 지 30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 뼘이 넘는 눈이 쌓인 차의 앞유리를 발견하고 기쁨과 동시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물함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버린 가방 주머니에 있는 자동차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있다. 이렇게 안 풀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 풀리는 날말이다.


“하.. 집에 갈까?”


나는 오후 3시가 넘어서 리프트에 앉을 수 있었는데, 무려 집에서 나온 지 8시간 만이었다.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스키장에 갈 때면 눈이 오길 빌었다. 아빠는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눈을 맞으며 스키를 탄다는 것은 365일 중 몇 안 되는 행운의 날이라고 했다. 오늘처럼 폭설이 내릴 때면 어린 나는 펄쩍펄쩍 뛰며 환호를 지르곤 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폭설이 내리는 스키장이건만, 이상하게 오늘은 슬로프 정상까지 올라가는 3분이 매우 길게 느껴질 만큼 지루했다. 정상에 다다르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거세졌다. 닦아내고 닦아내도 고글에 금방 눈이 쌓였다. 탁탁. 늘 그렇듯 헬멧을 두 손으로 쳤다. 그리고 출발.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의 첫 번째 런은 조심해야 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눈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 구덩이들을 생각하며 탐색하듯이 천천히 타야 한다. 조심스럽게 설질을 읽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두 번째, 세 번째 런을 더 완벽하게 탈 수 있다. 하루 종일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였는지 내가 눈을 다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초반부터 속도를 냈다. S자로 첫턴을 만드는데 푹하고 스키 엣지 끝에서 눈이 터져 나왔다. 짜릿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감각에 몸을 맡기고 두 번째, 세 번째 턴을 만들었다. 더 빨리, 더 빨리. 슥슥 S자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는 데 멀리서 형광색 물체가 보였다. 평소였으면 충분히 비켜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눈으로 덮여버린 고글과 속도 욕심 때문에 주행은 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쾅.


눈을 떴을 땐 스키장의 낡은 의무실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내 눈에 불빛을 비춰보고는 말했다.


“정신이 좀 드세요? 어디 아픈데 없어요? 외관상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입니다만." 의사인 듯했다.

“아픈 데는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사이드바에 부딪히면서 충격으로 잠시 기절한 것 같아요. 그래도 뇌진탕일 수 있으니 하루이틀은 어지럽거나 두통이 있는지 증상을 확인해봐야 해요."

“네? 선생님 저 하나도 안 아픈데요. 스키 타면 안 될까요?” 의사는 의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TV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특보 강원 동해안. 산지 대설 경보, 차량 운행 자제]


“리프트 운행은 중단이고요, 오늘은 폭설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울테니 이번 주말은 여기서 쉬면서 아프면 바로 의무실로 오세요."


단호한 의사 선생님의 충고를 뒤로하고 의무실을 나섰다. 야심 차게 금요일 연차를 내고 새벽부터 서둘러 여기까지 왔는데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눈물로 앞을 가린 채 숙소 체크인카운터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렴풋이 아까 봤던 형광색 물체가 보였다. 형광색 물체의 오른쪽엔 내 빨간색 스키가 왼쪽엔 검은색 보드가 서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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