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사례로 배우는 일-가정 양립의 참 의미
스웨덴, 노르웨이 등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함께 성평등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 고용률, 경제활동률이 높고 출산율도 높다.
그래서 2019년에는 여성가족부가 핀란드와 성평등 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은 꽤 오랜 시간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던 것에 비해 여성의 일-가정 양립 문제와 저출산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핀란드로부터 배울 점이 있으리라.
우리나라에서 ‘워킹맘’이라고 주로 불리는 ‘일하는 엄마들’은 사실 그동안 일터와 가정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한 편이었다. 일을 하는 공간과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엄마들의 삶의 질은 둘째 치고, 일단 일을 그만두는 여성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점차 양성 평등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2020년과 2021년 팬데믹으로 재택근무제가 도입되고,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일과 가정의 경계가 흐려졌다. 일을 하는 시간과 가정을 돌보는 시간, 일을 하는 공간과 가족과 함께 하는 공간이 서로 뒤섞여 버렸다. 그러자 일하는 엄마들의 위치는 크게 흔들렸다. 자녀의 돌봄 공백, 혹은 교육결손을 메꿔야 하는 엄마 역할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아빠는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만큼 돈벌이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팬데믹 상황에서 사회적 혼란을 겪었던 한국과 달리 핀란드는 일과 가족생활을 병행하는데 정말 별 어려움이 없었을까?
지난 2020년 3월부터 핀란드 정부는 방역정책으로 물리적인 거리두기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여 강도 높은 락다운(lockdown) 상태를 5월까지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동거 중인 맞벌이 가정의 일가정 병행 상황을 보고한 연구를 소개하겠다.
이 연구에 따르면, 거리두기 기간 동안 핀란드 커플들은 시간적, 공간적 차원에서 일과 가족의 경계가 흐려지거나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핀란드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팬데믹 상황은 일-가정 양립과 관련하여 여전히 양성 간의 차이가 존재함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업무, 자녀 돌봄, 가사 등 전반적인 일과 가정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로 엄마들이 재택근무로 전환하더라
배우자가 모두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업무 시간이나 가사 분담 등에 대한 분명한 합의가 부재했던 커플들의 경우, 주로 엄마들이 느끼는 부담이 크더라
커플 안에서 자녀 돌봄, 가사 등 책임을 위해 일에 관해 조율할 사항들을 논의하자고 먼저 제안하는 쪽은 주로 엄마들이더라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은 팬데믹 이전부터도 육아에 대한 책임이 엄마들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된 경우에 더욱 두드러졌다. 어렵사리 일과 가정을 병행하던 엄마들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가족의 필요를 채우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그에 맞춰 업무를 조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일부에게는 정말 ‘미칠 노릇(over the edge)’일 정도였다. 대부분의 배우자들은 팬데믹 이전부터 유지되었던 전형적인 성 역할에 따른 분업 방식을 지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일과 가정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가 불분명해지니 전통적인 성역할 관념에 따라 일하는 엄마들의 부담이 가중되는 현상을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연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성평등 선진국으로 선망하는 핀란드 조차 가족 돌봄에 대한 여성 책임이 크구나. 양성 간의 불평등한 구조를 깨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더 우선적으로 가정 돌봄의 책임을 느끼는 것이 정말 부당한 것인가? 사실 이에 대해서 다루는 게 우선이겠지만 위의 논문으로는 이 얘기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주제는 일단 차치할 수밖에 없다.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과정이 단순히 '일에 투입하는 에너지와 가정에 투입하는 에너지의 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과정을 단순히 일에 가족 돌봄의 역할이 추가된 것으로 축소 해석하면 곤란하다.
일과 가정의 병행을 설명하는 학문적 용어로 ‘boundary work’라는 개념이 쓰이는데, 이는 일과 가족의 영역을 창조, 유지, 재생산하기 위해 개인이 쓰는 전략, 실천, 과정들을 일컫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즉, 일과 가정을 병행한다는 것은 일과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조율하는 끊임없는 협상의 수고로운 과정(즉, boundary work)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성 평등한 일과 가정 양립’은 누가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남녀의 가사노동, 육아 시간을 비교하는 식으로 단순화해서 접근하면 곤란하다. 가정에서의 역할을 부부가 얼마나 동등하게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다뤄야 할 문제이다. 각 가정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해답도 재각각일 것이다.
그것보다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끊임없이 그 경계를 협상하는 부담 자체를 부부가 함께 담당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은 한번 정한 업무 분장표에 따라 경계 지워지고 엄격하게 지킬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Otonkorpi‐Lehtoranta, K., Salin, M., Hakovirta, M., & Kaittila, A. (2022). Gendering boundary work: Experiences of work–family practices among finnish working parents during COVID‐19 lockdown. Gender, Work, and Organization, 29(6), 1952-1968. https://doi.org/10.1111/gwao.12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