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만원버스에 올랐다. 피곤과 짜증으로 버무려진 얼굴들 사이에 몸을 비집고 넣었다. 추운 날씨에 히터를 튼 버스 안 공기가 답답하고 무거웠다. 창가로 스며드는 바깥 공기를 느끼기 위해 고개를 조금 돌리는 순간, 따뜻하고 거친 숨이 목덜미에 와닿았다. 몸이 닿는 불쾌한 기분에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딱히 이동할 곳은 없었다. 차창으로 확인한 실루엣은 키가 큰 40대 중후반의 남성. 무해한 얼굴. 평범한 집, 평범한 아버지의 얼굴. 나는 안심하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면서도 어떤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때는 고등학교 1학년. 외국에서 들어와 이제 막 편입학한 고등학교 근처에는 같은 이름의 남고가 있었다. 아침마다 사람이 가득찬 버스에 오르면 남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직 친구도 없고, 사정상 멀리서 다녀야 했던 나는 늘 혼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등교하곤 했다. 버스 창문가에 서서 노래 감상에 푹 빠져있던 어느 날, 지나치게 몸이 닿는 느낌에 눈을 뜨자 내 뒤로 누군가 바짝 붙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버스에는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었음에도 거북이 껍질마냥 등 뒤에 밀착된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목덜미 근처에서 느껴지는 더운 숨 역시 유난히 끈적하게 느껴져, 이어폰 소리를 줄이고 숨을 죽이자, 작게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창으로 확인한 형체는 남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두 명이었다.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봤지만 더 바짝 따라붙어 거의 뒤에서 안은 형세가 되었다. 만원버스에는 나를 도와줄 만한 어른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엉덩이와 허벅지가 닿는 감각이 끔찍해서 최대한 창가 좌석 쪽으로 몸을 누일 뿐이었다. 버스는 금방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여 나를 내려주었지만, 버스에 내려 해방 되기까지의 그 짧은 몇 분이, 내가 느꼈던 불쾌한 감정과 버무려져 뇌 한 구석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 법이다. 10년도 넘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목덜미에 닿은 평범하고 따뜻한 숨 하나로, 그날의 기억이 찐득한 촉감까지 수반하여 함께 느껴지는 것을 보면.
물론 내 감정은 고등학교 1학년, 아직 어리고 마음도 약하던 그때의 내가 느끼던 감정과는 다르다. 지금이라면 뒷발로 있는 힘껏 발을 밟아주는 것부터 시작 했을 테니까. 무한히 쪼개진 우주가 있다면 그 중 하나의 우주에서, 17살의 나는 무고죄로 고소당하더라도 일단 쌍욕부터 박았을테니까.
오늘 버스 안에서 나의 뒤에 서있던 사람은 평범하고 착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가 내뱉은 따뜻한 숨 하나로 그 앞에 선 30대 여성이 이런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단 걸 알면 그는 얼마나 억울할까. 알고 보니 그는 과거에 죄 없이 만원버스에서 치한으로 몰렸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을 떠올리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기억은 각자만의 것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법이니까.
출근길 만원 버스에 수많은 기억의 편린이 존재한다. 버스의 기억을 조립해본다. 맞지 않는 기억은 다시 분해하고, 편집하고, 이어 붙인다. 이러나 저러나 버스는 출발해야 하니까. 차창으로 쏟아지는 환한 아침 햇살만으로도 버스의 기억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