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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도담 Jun 02. 2020

선물 갈 카디건, 완성하다

뜨개질로 사부작사부작



뜨던 풀오버는 책상 옆에 꿍쳐 놓고, 사부작사부작 카디건을 떴다.

작년 말이었나, 동네 친한 언니가 스웨터를 하나 떠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뜬 원피스라기에는 짧고 스웨터라기에는 긴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갖고 싶다고 했다.

나야 꼼지락꼼지락 손뜨개가 취미이니 얼마든지 떠줄 수 있고, 이왕 뜬다면 기쁘게 써주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언니는 아주 적절한 사람이다. 뭘 해주면 정말 좋아하고 기뻐하고 그만큼 또 해주는 사람이어서. 


실 선택부터 디자인 선택까지 한바탕 고생이었는데, 실과 디자인 모두 신디니트로 결정했다. 신디님 실은 워낙 예쁘고 유튜브 영상도 따라 뜨기 쉽다. 공장처럼 목도리와 모자만 뜨던 내가 어설프지만 옷뜨기로 전향한 것도 다 신디님 덕분이다. 언니에게 떠준 옷은 다운탑 브이넥 니트였다. 실 600g 정도면 뜰 수 있는 디자인인데, 뜨다가 실이 모자라느니 몇 타래 남는 것이 백 배 나으므로 1kg이나 주문했다. 400g쯤 남으면 목도리라도 떠주겠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다른 곳에서 산 모헤어를 한 올 합사했기 때문인지, 실이 거의 500g 가까이 남아 버렸다. 

남은 실로 목도리도 좀 깨작거렸다가 마음에 안 차서 숄도 깨작거리고, 역시 마음에 안 차서 넥워머도 깨작거렸으나 다 풀어 버렸다. 언니가 워낙 추위를 잘 안 타서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패딩 입고 덜덜 떨 때 코트 입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다. 부러워라. 


아무튼 몇 달간 코를 잡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만 했다. 한 번 코를 잡고 떴다가 풀어낸 실은 뽀글뽀글 라면이 된다. 증기로 펴줘도 되지만 뭐든 귀찮아하는 것으로는 지구 일 등인 나는 그냥 대충 손으로 말아서 책상 아래에 처박아 놓았다. 뭘 뜨면 좋을지 한참이나 갈피를 못 잡았는데,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 덕분에 옷뜨는김뜨개님 채널을 만났다. 

쉽게 뜰 수 있는 뜨개 레시피를 제공해주시는 분인데, 이론에는 약한 나는 설명은 대충 넘기고 옷 디자인을 봤다. 탑다운 라운드넥 스웨터와 탑다운 라운드넥 카디건, 탑다운 브이넥 스웨터  영상이 있었는데, 카디건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김뜨개님이 쓰는 실과 내가 가지고 있는 남은 실의 굵기도 비슷했고 주로 쓰는 바늘 크기도 같았다. 


오호, 좋아. 이거다!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싶어 얼른 코를 잡고 영상을 보면서 뜨기 시작했고, 복잡한 부분이 끝난 후로는 학교 강의나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무한 겉뜨기만 했다. 겉뜨기겉뜨기겉뜨기겉뜨....앗, 코가 어디 갔지! 


(소매 분리하고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보려고 찍은 중간 사진이다.)



워낙 느린 곰손이지만 꽂히면 우직하긴 해서 시간이 나면 바늘을 잡았다. 그렇게 꾸물꾸물 꾸준히 떠서 드디어 완성! 


(완성하고 스팀 다림질 하기 전.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옷걸이는 못 본 걸로 해주세요. 호호)


완성 전과 완성 후의 색이 전혀 달라 보이는데, 신디님 합사실의 특징이다. 카메라가 오묘하게 예쁜 색을 도무지 잡아내지 못한다. 보정 카메라 앱을 쓴 완성 후 사진이 그나마 실물과 비슷한데 똑같진 않다. 신디님 실은 실물로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한 번 쓰면 반해서 자꾸 찾게 되는 마성의 실이다. 


단추는 예전에 패키지 구매했을 때 같이 샀다. 그 패키지를 결국 안 떠서 여기에 달았는데, 좀 더 색이 진한 단추여야 어울렸을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단추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단추달기가 너무 힘들었다. 초중고 가정 시간에 '내가 이런 걸 왜 해야 해!'라며 딴짓만 했던 자의 처절한 최후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고등학교 때만 해도 내가 나중에 나이 먹어서 뜨개바늘을 잡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스팀 다림질까지 다 마치고 입어보니, 언니에게 주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기적인 나란 사람의 물욕이란. 

'내 시간과 노력을 쪼개서 열심히 만든 건데 그냥 내가 가지면 좋겠는데! 애초에 수고비도 안 받잖아! 못 해도 몇 만 원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옷이든 인형이든, 뭔가 완성한 직후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서, 취미로 하는 일이지만 하다 보면 어깨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니까 묘한 보상심리가 발동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잠시이고, 받는 사람이 기뻐할 표정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설령 옷장 안에 계속 잠들어 있기만 하더라도 내 옷장이 아니라 남의 옷장이라면 기쁘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해서 선물을 강요하는 셈이려나?



다 뜨고 나서 생각났는데, 앞으로 고무단을 꼬아뜨기로 뜨겠다고 다짐하고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물론 그냥 고무단도 예쁘니까 괜찮다. 

아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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