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결혼식을 기획한 신부의 사연
결혼(結婚) :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다.
- OO대학 나오셨으면 이 근방은 잘 아시겠네요.
- 아니요. 저는 @@대학 졸업했어요. 건축이 전공이라고 하셨죠?
- 아니요. 토목공학이요.
- 건축이랑 토목이랑 다른 건가요?
- 네. 완전 다르죠. 저는 토목 중에서도 터널 설계를 주로 해요.
- 터널이면 친환경과는 좀 거리가 있겠네요.
- 글쎄요. 전 터널이 오히려 친환경적이라 생각하는데요.
소개팅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 남녀가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일까? 심지어 결혼할 확률은?
딱 봐도 아닐 것 같은 대화를 나누고도 우리는 다시 만났다. 공원을 걷고, 갈치조림을 발라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또다시 만났다. 경복궁 옆을 나란히 걷고, 이란 영화를 함께 보고, 프랑스 영화까지 졸며 보다 보니 한 해 하고도 반절이 지났다. 동그란 반지 한 쌍에 이니셜을 새기고 하나씩 나눠가졌다. 봄이 한껏 부풀어 오른 4월에 우리는 동갑내기 부부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양가 모두 천주교 집안이라 당연히 성당에서 결혼을 할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성당 결혼식은 나의 오랜 로망이기도 하였다. 인연도 없는 남의 성당 결혼식을 참관하기까지 하며 거룩하고 성스러운 결혼식을 상상했었다. 그 오랜 로망을 깬 건 바로 나였다. 출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전혀 없었던 나에게 주님 뜻대로 자식을 낳아 키우겠다는 선서가 갑자기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맘에 두고 있던 성당은 장소가 협소해 하객들의 식사를 위한 장소를 따로 대관해야 했다. 이를 두고 친정 엄마와 옥신각신하던 나는 결국 도전장을 내밀었다. 엄마, 나 레스토랑에서 결혼할래.
엄마의 첫 반응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큰 일을 왜 네가 결정하냐고. 여기서 결혼식에 대한 모든 갈등의 답이 나온다. 결혼이란 무릇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레스토랑 결혼식을 해내고야 말았다. 큰 홀에서 결혼했으면 하는 친정부모님의 바람을 배신하고 웬만하면 성당에서 결혼했으면 하는 시부모님의 바람을 못 들은 채 하며 홍대 앞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대신 나에게는 두 번의 지방 피로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내가 원하는 결혼식을 사수할 수 있다면야 피로연 두 개는 감내하는 수밖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3주 연속으로 결혼 행사를 치렀다. 첫 주에는 내 고향에서 친척 및 지인들과 첫 피로연, 두 번째 주에는 남편 고향에서 친척 및 지인들과 두 번째 피로연, 그리고 3주 차에 우리는 드디어 레스토랑 결혼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의 지방 피로연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남편과 나는 행사 내내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여기는 누구시다, 여기도 누구시다, 인사하렴, 인사하렴. 한복 치마 끝자락을 부여잡고 부모님의 손길을 따라 예의 바른 미소와 인사를 드리다 보면 피로연은 끝나 있었다. 피로연의 손님들이 대부분 부모님의 손님이었기에 나중에 떠올려봐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작은 레스토랑에서의 결혼식을 추진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와주신 모든 손님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결혼식. 오랜 로망과는 달랐지만 의미 있는 결혼식을 직접 기획하기로 했다.
영화 헤드윅에서 노래하던 사랑의 기원이 떠오릅니다
본래 한 몸이었던 남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가 둘로 나뉘어
서로에게 꼭 맞는 반쪽을 찾아 헤맨다는 그 이야기 말입니다
늦가을 홍대 앞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의 오늘이 서로의 영원한 반쪽이 되기 위한 자리일 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수만 겹의 우연과 필연이 겹쳐 만난 귀중한 반쪽과 부부의 연을 맺고자 합니다
그 귀중한 순간을,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객들은 우리의 청첩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일단, 내용이 길어서 직접 읽어봤다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청첩장 내용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청첩장에 헤드윅이라니 이걸 진보적이라 해야 하는 거니 라는 평들도 있었다. 웃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써 준 제각각의 짧은 메모였다고 한다. 저렇게 긴 초대 문구만으로도 나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당신이 정말 내게는 특별해, 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청첩장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하객의 청첩장에 직접 짧은 편지를 썼다. 시간이 지나도 간직할 수 있는 청첩장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악, 비가 와
결혼식 당일, 눈뜨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춘사월 내 결혼식에 비라니, 새벽같이 미용실로 가는 차 안에서도 심술이 가득 늘었다. 비 오면 잘 산대 라는 말은 위로하려고 누가 만든 말이야. 신랑에게 아침부터 짜증을 퍼붓고 나니 미용실에 도착, 같은 날 결혼하는 예비부부들로 미용실의 새벽은 북적였다. 이모님이 없는 신부는 나 한 명이었다. 스냅사진 기사님과 미용실 직원들이 계속 이모님을 찾아 번번이 없다고 말씀드려야 했다. 면사포를 인터넷으로 산 신부 역시 나 한 명인 것 같았다. 미용실 실장님의 당황하던 손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걸 어떻게 머리에 달아야 하나 수 분간 고민하시더니 그래도 재주 좋게 얹어 주셨다. 그 날 가성비 최고의 면사포는 내 것이었다.
비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레스토랑 지배인님은 테라스를 최소한으로 사용하겠다고 하시면서 우천 대비용 테이블 세팅을 가동하셨다. 테라스가 탐났던 레스토랑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컸다. 주차도 넉넉지 않고 지하철 역에서도 꽤 걸어야 하는 레스토랑까지 비 오는 날 결혼식을 오려나 걱정하는 마음은 더 커져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초대한 거의 모든 하객들이 비를 뚫고 와줬다. 너무나 감사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는 당사자인 우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혼식의 꽃은 신부나 신랑이 아니라 결혼식을 한 자리 한 자리 채워주는 하객이었다. 하객이 빠진 결혼식이 제아무리 성대해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금은 빌딩이 되어버린 우리의 결혼식장은 3층으로 이루어진 레스토랑이었다. 서운한 사람이 한 가득 되도록 고르고 골라 초대한 적은 수의 하객이었는데도 레스토랑의 다락까지 하객 좌석을 마련해야 했다. 더군다나 비까지 왔으니 정성스럽게 세팅한 테라스에서는 추워서 아무도 식사를 하질 못했다. 그래도 예식만큼은 테라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었는데 예식 막바지에는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마냥 좋았는지 나중에 받은 결혼사진 속의 나는 내내 웃고만 있었다.
신부 대기실은 따로 꾸미지 않았다. 레스토랑 3층의 빈 공간에 이것저것 짐을 놓고 친구들을 맞았다. 마음 같아서는 신랑과 직접 입구에 나가 하객을 받고 싶었다. 신랑 대기실은 없는데 왜 신부 대기실이 필요해. 당돌한 내 말에 엄마는 정말 이상한 애라고 혀를 내두르셨다. 다행히 웨딩 슈즈가 꽤 높았고 게다가 비도 왔다. 유난스러운 딸을 버거워하던 친정 엄마에게는 참 고마운 비였을 것 같다.
신부 대기실을 만들지 않은 철부지 신부는 신랑의 손을 잡고 식전에도 이 곳 저 곳을 누비며 인사를 드리러 다녔다. 보통 신부들은 조신하게 대기실에 앉아 있곤 하는데, 철부지에게 조신함이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친구들은 처음 레스토랑에 와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에 한 번 놀라고, 나의 거침없는 이동에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청바지를 입고 결혼할 줄 알았는데 웨딩드레스를 입어서 놀랐고, 드레스 입은 신부가 너무 크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다녀 정말 놀랄 일이었다고 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둘 다 놀랄 일이 맞는 것 같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연습한 노래를 부르며 동시 입장하였다. 시부모님은 그때 생전 처음 신랑의 노래를 들으셨다고 한다. 시아주버님은 쟤가 드디어 미쳤네 라고 한 말씀 하셨다고 한다. 다른 하객들은 깔깔대고 웃느라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상보다 뜨거운 하객들의 응원을 받으며 입장을 마쳤다. 비는 연신 소리를 내며 레스토랑을 감쌌고 사람들은 조용히 우리를 주목하였다.
레스토랑에서 하는 결혼식이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반지를 나눠서 끼우고 혼인서약서를 읽고 양가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축가까지 완료했다. 다시 앞으로 마지막 행진을 하고 하객들의 축하를 받았다. 이미 피로연을 치렀는데도 친정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 철없는 딸내미는 엄마가 울어도 눈물이 나질 않았다. 신랑의 여자 친구와 나의 남자 선배가 각각 축하의 인사를 덧붙였다. 대학 선배는 주례 없는 결혼식의 숨은 주례였다는 평을 들으며 긴 긴 축하의 말을 해줬다. 모든 게 감사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주는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하이라이트로 손색없는 자리였다.
예식은 내가 만든 '결혼식 큐시트'에 맞춰 무난히 진행되었다. 더 어렸던 시절에 방송국에서 큐시트를 만들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결혼 큐시트를 완성하였다. 큐시트를 위해 여러 번 레스토랑 지배인님께 전화를 드리고 수 차례 이메일을 썼다. 보통은 웨딩 플래너가 하는 일이었기에 지배인님은 예식 후 정말 일을 잘 하는 신부라고 둘러 칭찬해 주셨다. 아마 신부와 직접 소통하시면서 매번 피곤하셨을 게 분명하다. 다행히 그 후에 지배인님과 나는 SNS 친구가 되어 아직까지 서로의 근황을 확인한다.
얼마 전 아파트 내에 라일락이 활짝 피었다. 봄도 활짝 피었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기념일도 돌아왔다. 남편은 출근하느라 나는 아이를 돌보느라 각자 바쁜 별다를 거 없는 또 하나의 하루였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던 친구가 축하의 문자를 보내준 게 그 날의 가장 특별한 일이었다.
결혼식 자체는 몹시 특별한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매년 반복될 결혼기념일을 포함해 결혼식 이후의 하루하루가 매일 특별하기는 힘들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도 결혼식 날의 그 감사했던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 박수쳐주는 하객이 곁에 없더라도 우리의 다짐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이외에도 '결혼'에는 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이 숨어있는 것 같다.
올해 맞이한 4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탄생할 춘사월 신랑신부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모든 부부들의 탄생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을 하객들에게 진심의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당신들이야말로 결혼식을 수놓은 진짜 춘사월 꽃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