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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프 Aug 19. 2020

남편의 비상금을 털다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다. 내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3년 내내 한결같았고 지금도 딸들보다 내가 먼저다. 아니다. 믿지 못할 인간이다. 비상금을 온 집안 곳곳에 숨겨두고 기회만 보이면 알뜰히 술을 퍼마시는 외계인이다. 크헙. 어떤 것이 남편의 진짜 모습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남편의 지구 나이는 45살인데 외계인은 나이도 인수분해가 되는지 어쩔 땐 3살 같다가 어쩔 땐 25살 같 또 가끔은 원래 나이로 돌아오는 듯. 정말 왔다 갔다 자기 맘대로다.


남편이 3살 같을 때는 특히 신생아적인 놀부 심보가 독보적이다. 하품하는 애들 입에 발가락 넣기, 얼굴 앞에서 방귀 뀌고 도망가기, 밥 먹을 때 똥 얘기하기, 얼굴 기름 묻히고 도망가기(얼굴에 개기름이 그렇게 좔좔 흐를 수가 없다. 개띠인 줄.) 정말 더러운 짓거리만 골라한다.


25살 같을 땐 까칠한 사촌오빠가 된다. 초5학년 딸과 진심으로 말다툼하기, 잔소리 대마왕 되기, 온 집안 청소상태에 딴지걸기, 금토일 3일 안 씻기, 웹툰 결재로 핸드폰 요금에 폭탄 투하하기. 하루가 멀다 하고 술퍼 마시기. 시크한 동아리 선배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눈떠보니 PC방에서 죽치고 게임만 하는 한심한 남자 동기가 옆에 있는 느낌이다(속아서 결혼한 것 같다는 얘기다).


이런 내 남편은 비상금 숨기기가 취미다. 줄기차게 비상금을 만들고 털리기를 수시로 한다. 이럴 땐 꼭  살 뇌를 탑재한 스물다섯 살 몸뚱이가 다채롭게 트랜스포머 된 것처럼 보이며, 허술하기가 우리 동네 목욕탕 사우나 같다.


박카스 상자에서 50만 원을 찾았다.

어느 날 퇴근길에 박카스 한 상자를 들고 왔다. 주방에 있는 반투명 유리 장식장 안에 정성스레 놓아놓는다. 저 인간은 또 카스야. 당연히 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줄기차게 박카스 앞을 서성인다. 뭔가 후다닥 거리며. 힘낼 일도 없는데 박카스를 퍼마시면서 말이다. 뭔가 찌리릿 감이 왔다. 남편 출근 후 열어보니 50만 원!!! 그날 저녁 시아버지로 인한 내 인고의 세월을 눈물로 고하니. 로또 4등 당첨금이다. 50만 원 내 거. ㅎ


침대 밑에서 100만 원을 찾았다.

이 인간이 부스럭 거리는 봉투를 가지고 왔다. 중요한 서류라며 침대 시트 밑에 둔다(예전엔 부동산 계약서 같은 중요한 서류를 거기다 뒀다). 그래 중요한 서류를 거기다 두는 게 우리의 약속이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둥도 부술듯한 골리앗 같은 힘이 넘쳐흐르며 침대 시트를 들어 올리고 싶다. 찾았다. 노란 봉투에 100만 원. 그러면 그렇지. 어디서 성과급을 떼먹으려고. 난 공항에서 마약사범도 찾아낼 개코를 가졌다고. 크하하하. 그날 저녁은 5년간 주말 부부로 지낸 인현왕후 같은 지난 삶을 한숨 비트에 맞춰, 쇼미더머니에 나갈 듯, 처절하게 되새김질하니 100만 원 봉투가 내 앞에 도달하였다. 로또 3등 당첨! ㅋㅋ


그리하여 남편은 내 핸드폰에 '로또자기~~' 라는 애칭으로 입력되어 있다.

남똘의 애칭 '로또자기~~'


그나저나 요즘은 나의 연기력이 고민이다. 나이가 드니 진정성 있는 눈물 짜내기가 힘들고 잘 먹히지도 않는다. 비상금을 찾아내는 촉도 떨어진다. 아무래도 두 딸과 동맹을 맺어야 할 듯. 그리고 이젠 10만 원 미만은 그냥 못 본척해줄 작정이다. 좋아하는 술. 친구들과 한잔할 돈은 있어야 남똘도 숨통이 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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