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끙끙 앓았다. '내가 왜 이러지?' 분명 열도 없고 몸도 멀쩡한데.. 자꾸만 눕고 싶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를 두 번이나 정주행 했다. 현빈과 손예진의 러브라인만 흥미진진한 줄 알았는데, 우연히 스치듯 보게 된 철종이 짤 덕에 '철인왕후'에 빠져 며칠을 허우적 댔다. 이후 무려 33%나 세일하는 청바지에 꽂혀 하루 종일 주문했다 취소했다 주문했다를 반복했다.
뭐지.. 우울증인가..
원인을 찾으려고 한참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불안하고 후끈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때문인 것 같았다. 몇주전, 전자출판 제의를 받고는 기쁨은 잠시.. 부담이 10000만 배나 다가왔다.
아.. 못하겠다. 지금이라도 못한다고 말해야 되나..
한글 파일을 열고 글을 쓰려고 하니 단 한 글자도 못쓰겠다. 에휴.. 팔자에도 없는 출판은 왜 한다고 해가지고.. 이건 떡볶이를 2인분이나 먹어도 해소되지 않을 스트레스다.
며칠간 끙끙대다 결국 포기했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을 내려놔 버렸다. '하는데 까지만 하자' 포기하니 거짓말처럼 글이 써진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16번 김희정 17번 김현정
고등학교 입학하고 17번이라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뭔가 럭키한 기분이었다. 7이란 숫자가 들어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딱 김희정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김희정은 전교 1등이었다. 성적이 나오면 늘 100점.. 저게 인간인가.. 싶어 존경스럽기도 했다가.. 희정이 다음 순서로 불리는 내 성적을 들으면 급격히 좌절이 됐다.
16번 100점, 17번 88점
88점도 나쁜 점수가 아닌데. 늘 비교돼서 스트레스가 쌓였다. 희정이를 꼭 한 번은 이겨보고 싶었다. 공부로는 안되니 100m 달리기가 있는 체육시간. 100m 달리기 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희정이는 몸무게가 70kg 나갔기 때문에 더 가벼운 내가 잘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체육선생님이 달리라는 수신호를 보내자마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
한 중간쯤 왔을까.. 눈을 슬쩍 떠보니 내가 라인을 한참 벗어나 플라타너스 나무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닌가. 얼굴은 새빨개졌고, 라인으로 되돌아와 다시 뛰니 100m를 24초에 뛰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당연히 희정이가 나보다 빨리 결승점을 지나쳤다.
이런 젠장.. 달리기로도 안 되는 군....
이후로 나는 (희정이는 신경도 안 쓰는) 마음속으로 줄다리기를 그만두었다. 희정이는 희정대로,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빨리 포기하길 잘했다. 희정이와 고3 때 또 한 반이 되었고 희정이는 또 내 앞번호가 되었다. 게다가 희정이는 서울대 법대를 갔으니.. 희정이를 기준으로 잡고 계속 비교를 해댔으면 좌절감을 품고 살 뻔했다. 혹시 모른다. 희정이를계속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다면 2등 코스프레를 하며 사전을 씹어먹고 옥상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이 세상을 하직할 생각을 했을지도...
즐길 수 없으면 피해라
개그맨 박명수는 말했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해라', '내일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오늘 할 필요는 없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말이지만 명언이라 생각한다. 즐길 수 없는데 굳이..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낑낑대며 오늘.. 다 감싸 앉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편하게 살아도 한평생, 고민하고 살아도 한평생인데..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포기할 것은 포기한 체 편하게 살아도 된다.
최선을 다 해라
힘내라, 버텨라
끝까지 해보자
넌 할 수 있어
이런 말들이 어쩔 땐 너무 숨 막히고 힘들다. 힘들면 잠시 쉬고, 못 하겠으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에게 한 발짝 더나아가라는 응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포기는 무엇을 잘 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포기를 포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