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나에게 주어진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온전하게 소화시키면 경험이라는 영양분만 남아 몸의 근육을 만든다. 그렇게 단단해진 몸으로 또 다시 부딪히고, 실패해도 또 부딪히고, 계속 부딪히다보면 결국은 돌파구를 만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실패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맷집이 좋다고 하더라도 라이트급이 헤비급을 감당할 수는 없다. 라이트급은 그에 맞는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 소화하지 못할 시련이 주어진다면 체하기 마련이다. 그때는 동력을 잃어버리고 좌절해버릴 수 있다.
두 번째는 실패의 과정 속에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체급에 맞는 실패라 하더라도, 실패는 결국 실패다. 길게 봤을 때는 성장의 동력일지라도, 지금 당장은 상처일 뿐이다. 상처뿐인 당장을 견디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잘해왔다는 위로. 잘하고 있다는 격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응원. 나를 믿고 곁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준다면 다시금 일어설 용기를 가질 수 있다.
2017년 5월의 어느 날, 최원준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 단계 성장했다.
이날 최원준은 자신에게 찾아온 3번의 만루 찬스를 모두 제 손으로 날려버리면서 실패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휘말렸다. 첫 타석에 안타를 만들면서 기분 좋은 시작을 알린 것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은 경기를 치르는 내내 실시간으로 사색이 되었다.
만루가 다가오는 과정 또한 썩 유쾌하지 않았다. 첫 만루가 만들어질 때, 최원준의 앞 타자 김선빈은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고의4구는 아니었지만 베이스 하나가 비어있었고 다음 타자인 2년차 신인을 상대하기가 더 수월하다는 판단이 보이는 투구였다. 코치와 주먹 콩을 하며 결의를 다진 그가 싱겁게 2루 땅볼로 물러나면서 그 판단은 틀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 타석 이후 상대는 최원준에게 더욱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7회 말 2아웃, 상대는 실점의 위기에서 김선빈을 고의4구로 거르면서 의도적으로 그와 승부하기를 골랐다. 가뜩이나 한 번의 찬스를 무산시켜 위축된 그에게, 상대는 “너는 쉽게 잡아낼 수 있다”는 태도로 큰 압박을 가했다. 타석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긴장감을 추스르고자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 한 번 어정쩡한 스윙이 나왔고, 3루 측 파울 영역으로 날아간 타구를 3루수가 처리하면서 이닝이 종료되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박빙으로 흘러가던 이날 경기는 4-4 동점인 상태로 9회 말을 맞았다. 딱 한 점만 내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황. 반대로 말하면 상대는 단 한 점의 실점도 용납할 수 없었다. 상대는 또 다시 김선빈을 고의4구로 거르며 최원준을 선택했다. 감독은 그에게 딱 한 가지 지시만 했다. “자신 있게 쳐.” 너의 스윙을 하면서 자신 있게 휘두르라는 감독의 말은 곧 작전이고 사인이었다. 이미 두 번의 만루 찬스를 날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정쩡한 스윙으로 삼진을 당하면서 타석을 빠져나왔다.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타자인 김민식마저 2루 땅볼로 물러나면서 경기는 연장으로 흘러갔다. 연장이 진행되는 내내 중계 카메라는 최원준을 비췄다. 그는 두 손을 모은 채로 덕아웃의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엄청난 실의에 빠져있었다. 3번의 만루 찬스가 찾아왔는데 단 한 차례도 득점과 연결시키지 못한 자신을 향한 속상함이 얼굴에 가득했다. 툭 건들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로 덕아웃 난간에 기댔다가 손톱을 물어뜯었다가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11회 말, 찬스는 죽지도 않고 또 찾아왔다. 연속 안타로 만들어진 무사 1, 3루 상황에서 스퀴즈 작전이 실패했지만 상대의 볼넷과 폭투가 나오면서 1사 1, 3루가 된 것이다. 여기서 상대는 또 김선빈을 고의4구로 거르면서 최원준과의 승부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김선빈은 한 경기에 고의4구 3번이라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는 만루에만 4번째 타석을 들어가게 되었다.
이쯤 되면 대타를 쓸 법도 한데, 감독은 끝까지 고집스럽게 최원준을 밀고 나갔다. 천천히 타석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상대 포수와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장비를 풀던 김선빈과는 완전히 대비되어 보였다. 그러나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긴장이 아닌 결의였다. 단단히 꼬인 매듭을 스스로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
가볍게 호흡을 뱉은 최원준은 초구부터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스윙을 돌렸다.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승리를 향한 갈망을 담은 커다란 스윙은 공을 정확하게 맞췄고, 타구는 아주 멀리 멀리 허공을 갈라 담장 밖으로 떨어졌다. 극적인 끝내기 그랜드슬램에 동료들은 물통을 든 채로 일제히 덕아웃을 뛰쳐나왔다. 야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빨간 유니폼과 노란 단무지를 흔들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온 세상이 최원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 흔한 홈런 세리머니 하나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자기에게 할 말이 뭐 그리 많은지 연신 중얼거리만 할 뿐이었다. 홈에 다다른 그는동료들의 물세례를 온몸으로 받은 후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던 감독의 품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어보였다.
2년차 최원준에게 이 날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시련처럼 보였다. 차라리 타석에서 빼주는 게 선수의 멘탈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선택처럼 보였다. 경기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감독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독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련은 2년차에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3년차에도 4년차에도 그 후로도 계속해서 찾아온다는 것을. 언제나 2년차일 수만은 없는 그에게, 감독은 몸을 부딪쳐 깨져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실패의 경험으로 몸은 더 단단해지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내기를 바랐다.
그래서 감독은 믿음을 주었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으로 위로를 건넨 뒤, 자신 있게 하면 된다는 격려와 타석에서 빼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는 응원으로 최원준을 지지했다. 그 믿음에 부응하고자 최원준은 힘차게 스윙을 돌렸고 결국 끝내기 그랜드슬램이라는 결과를 만들며 성공의 경험도 함께 쌓을 수 있었다.
이 날로 실패를 돌파하는 방법을 경험한 최원준은 더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걸어왔다. 더 큰 위기가 찾아와도 잘 견뎌왔다. 그 결과 이젠 타이거즈 외야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거듭났다. 실패를 착실하게 소화하며 성장해온 선수에게 딱 걸맞은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