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여 그를 포기하여라

by 와루



어느날, 우연하게도 한 밴드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아직도 어리디 어린 호랑이의 해맑은 미소가 떠올라 한참을 울었다. 그 어린 호랑이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과 비례하는 행운이 그에게도 닿길 바랐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너무나도 화가났다. 속상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한숨만 푹푹 쉬던 차에 그 노래를 듣고 울분이 터져 펑펑 눈물을 쏟았었다.




이의리는 그 누구보다도 지독하고 잔인한 2023년을 지나왔다.


이의리의 23시즌은 분명 햇빛처럼 눈부실 것만 같았다. 최정예 멤버들만 갈 수 있다는 wbc 국가대표에 선발된 이의리는 씩씩하게 굳센 포부를 밝히고 일본으로 떠났다. 혼자 덜렁 일본으로 떠나야했던 도쿄올림픽때와는 달리 이번엔 나성범 양현종을 양쪽에 끼고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오는 시간이길 바라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아니 나빴다. 안 털린 투수들이 없는 그 와중에 하필 이의리는 오타니에게 몸에 바짝 붙는 볼을 던졌다는 이유로 더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의도한 투구도 아니었고, 몸에 맞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장면이 유튜브 쇼츠로 퍼지면서 끝도 없는 비난을 견뎌야 했다. 본격적인 시즌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시련을 맞은 것이다.


고난과 함께 시작한 3년차는 역경의 연속이었다. 제구난조는 여전했고 그에 따라 이른 강판도 잦았다. 꾸역꾸역 던지면 5이닝, 아니면 4이닝. 전반기 동안 이의리의 이닝 소화력은 확실히 저하된 상태였다. 그동안의 피로 누적일수도 있고 멘탈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팀 사정'이라는 명분이었을 그 이유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그냥 안 좋은 상태에서 공만 던지고 있었다. 루키때와는 다른 타자들의 득점지원으로 승수는 많이 챙기고 있었지만 본인이 완전하게 압도하여 승리를 만드는 경우는 적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선발 로테를 지키면서 팀이 흔들리지 않도록 버텨주었다.


그러던 중 들려온 아시안게임 대표팀 승선 소식. wbc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겠다며 팔이 빠지도록 던지고 오겠다던 이의리는 오랜만에 미소를 띠면서 결의를 다졌다. 목표는 무조건 금메달, 꼭 잘하고 오겠다는 이의리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근심 걱정 가득하던 얼굴에서 이제 좀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팬도 팀도 이의리도 서로 정말 기분이 좋았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이의리의 그 결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같지도 않은 이유로 엔트리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부상으로 인한 부진. 상태를 확인하겠답시고 대표팀 소집 하루 전날 친히 대전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부담스럽게 지켜보고는 이의리가 마운드를 내려가자마자 고개를 저으면서 자리를 떴던 대표팀의 그 사람들. 아무리 잊히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 활약을 부진이라고 하기엔 다른 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였고, 부상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가락은 물집 하나 없이 깐달걀마냥 매끈했고, 150을 상회하는 공을 던질 정도로 어깨도 좋았다. 그런데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상'으로 인해 이의리는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당시 이의리는 옆에서 건들수도 없을 만큼 힘들어했다고 했다. 게임이 안 풀려도 한번도 눈물 흘린 적이 없던 놈이었는데. 걍 짱구 극장판이나 보면서 찔찔 울던 놈이었는데. 그런 놈이 말을 걸기도 힘들 정도로 울먹거렸다고 한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선배를 넘어 원로급 어른들이 갓 스물 두살짜리 어린 선수를 아무리 위로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그 상황으로 떠밀어버린 것이다.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갸빠들은 그저 같이 울어줄 뿐이었다.


지독같은 구렁텅이 속에서도 이의리는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있지도 않았던 부상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장하기 위해서, 하지도 않았던 부진이 정말 없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오랜 이닝 소화가 불가능할 거란 억측이 완전하게 틀렸다는 걸 규명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편견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순간들을 하나씩 깨뜨리며 이의리는 또 한번 스스로 자신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어려운 환경에서 이의리는 개인 최다 11승을 달성했다.


특히나 잔인했던 23시즌이 끝나고 이의리는 또 한 번 국가대표에 소집되었다. 맘 같아선 다 깽판놓고 국대 보이콧하고 싶었지만 그건 애샛기같은 나 따위나 하는 생각이고. 의젓하고 성숙한 이의리는 불평불만 하나도 늘어놓지 않은 채 해맑은 표정으로 "나라가 부르면 언제든 던지겠다"는 마인드로 즐겁게 출국길에 나섰다. 그리고 이의리는 그 다짐을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실현하고 왔다. 한일전에서의 등판. 6이닝 2실점. 16년만에 달성한 한국 선발의 한일전 퀄리티스타트. 홈런을 맞긴 했지만 그 타자를 상대로 다음 타석에선 기어코 내야땅볼로 잡아내는 그 패기. 오랜만에 만나본 마운드에서의 즐겁고 당찬 모습에 갸빠들 또한 함께 즐거웠었다.


무엇보다 행복했던 건, 대회가 끝난 후 이의리가 남긴 소감 때문이었다. 루키시즌 이후로는 야구가 재밌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던 이의리였는데. 맨 먼저 꺼낸 말이, "너무 재밌었다."였다.


얼마만인지 모를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지난 시간을 그 누구보다도 고되게 보낸 걸 알기에, 많은 고민속에 놓여 있었어도 열심히 헤쳐나가주었기에, 그런 이의리였기에 지금은 지쳤더라도 언젠가는 꼭 좋아하는 야구를 다시 재미있어하길 바랐었는데. 그랬던 이의리가 이런 말을 해주어서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붙인 "나의 내년이 기대됐다"는 말은 자신감을 풀충전한 패기 넘치는 루키 시절의 이의리를 다시 만난 것 같아서 너무너무 좋았다. 그리고 즐거움과 자신감을 동시에 회복한 24시즌의 이의리는 얼마나 강해질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맞은 24시즌이었기 때문에 팀도, 선수도, 팬들도 정말정말 기대가 많은 채로 시작했었다. 이의리를 막아설 더 이상의 절망은 없을 거라고, 이 정도의 억까를 당했으면 이젠 해피 베이스볼만 남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마음으로 나 역시 오랜만에 핸드폰 배경화면을 바꾸었다. 이의리가 가장 멋졌던 때의 가장 멋있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핸드폰에 담아 매일매일 보면서 그가 아프지 않고 공을 던질 수 있기를, 더 나은 성적을 거두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기를 매일매일 바랐었다. 그 바람이 아무래도 부족했었나보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의리가 빛났던 그 모든 순간이 후회가 된다.


데뷔하자마자 거의 풀타임 주전 선발로 뛸 때, 그거 막아볼라고 프런트에 주먹이라도 꽂아볼 걸.

올림픽가서 3일 휴식받고 두번째 등판을 가졌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도쿄에 트럭이라도 박아볼 걸.

올림픽 끝나고 돌아와서 휴식 한 번 없이 바로 로테 돌릴 때, 감독놈한테 넥슬라이스라도 날려볼 걸.

신인왕받고 제대로 된 축하도 못받고 인스타 댓글 막았을 때, 악플러들 잡아다가 족쳐둘걸.

상태 안 좋은 때에도 휴식 한 번 안 주고 계속 로테에 둘 때, 슬라이딩해서 태클이라도 걸어볼 걸.

4일 로테 연속으로 돌릴 때, 감독놈 모가지를 4일 연속으로 돌려볼 걸.

한계를 극복하랍시고 갑자기 117구 ㅇㅈㄹ 할 때, 감독놈을 117번 연속으로 곤장이라도 쳐볼 걸.

어깨 염좌로 갑자기 마운드 내려왔을 때, 감독놈 어깨라도 뽑아서 줄 걸.

후보 명단에도 없던 놈을 wbc로 끌고 갈 때, 바지끄댕이라도 잡고 말릴 걸.

아겜 명단 가지고 ㅈㄹㅈㄹ할 때, 개소리하는 인간들 입을 때려줄 걸.

아겜 대표팀에서 떨어졌을 때, 전력강화위원회에 총공이라도 해볼 걸.

이상한 소리 뱉어두고 출국할 때, 공항에 찾아가서 피켓시위라도 할 걸.

기쁜 마음으로 아펙 간다고 했을 때, 온몸으로 뜯어 말릴 걸.

아픈 팔 두고 오른손으로라도 싸인해줄라고 연습한다고 했을 때, 그 매직을 확 뺏어버릴 걸.


우리한텐 너무 귀하고 소중한 선수여서 어떻게하면 금이야옥이야 아끼면서 오래오래 귀중하게 쓸 수 있을까 했는데, 정작 지들 것도 아닌 인간들이 선수 귀한 줄도 아까운 줄도 모르게 함부로 쓰다가 결국은 수술을 하게 만들었다는 게 너무나도 화가 난다. 팬들한텐 너무나도 귀중한 놈이어서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 아꼈던 선수를 지들 실적에 눈이 멀어서 막 써댄 지난 날들이 마구 스쳐지나가서 정말 너무 울화가 치민다.


나름 야구계의 '어른'들이라는 인간들이 지들만 생각하다가 스무살도 더 어린 놈의 팔을 망가뜨렸는데 그 아무도 사과를 안 했다. 사과한다고 수술 결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이라면 자신들로 인한 상황에 유감이라는 표현 정도는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이 울분을 진정시켜주는 건 또 의젓한 이의리다. 팬분들의 응원에 감사하다며, 힘든 시기에 다들 노력하고 있으니 팀에게도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긴 이의리 때문에 다시 한참을 울었다. 정작 가장 심란할 사람은 본인일텐데 그런 사람이 우리를 달래주고 있으니 참 고맙고 미안했다.


3년차가 되기까지 험한 진흙탕에서 정말 거칠게 구르며 성장한 이의리. 팀이 가장 힘든 시기에 구세주처럼 내려와 갸빠들의 마음을 구원해준 이의리. 팀의 암흑기 동안 꿋꿋하게 버텨주며 갸빠들의 한 줄기 빛이 되었던 이의리. 올림픽 대표 선수로 타이거즈에선 유일하게 선발되고 18탈삼진을 잡으며 다 무너진 갸빠들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주었던 이의리. 36년만에 타이거즈의 신인왕이 되어 빛나던 순간에도 바보같이 매단 타이로 엉뚱한 모습을 보이며 웃음을 안겨주던 이의리. 게임 개판치는 선배들을 등 뒤에 두고도 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화난 갸빠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이의리. 이제 팀이 안정기에 접어들어 더 높은 곳을 바라보자 약속하려 했는데, 그는 올 시즌 우리 곁에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얼마전에 울면서 들었던 노래는 페퍼톤스의 <GIVE UP>이었다. 이 노래는 페퍼톤스 특유의 청량한 멜로디가 유난히도 돋보이는 곡이다. 그리고 가사가 정말 좋은데, 마지막즈음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절망이여 나를 포기하여라



이처럼 지독한 절망을 연속해서 맞닥뜨리는 선수도 드물 것이다. 이렇게나 괴롭히는 꼴이 꼭 절망 앞에 무릎 꿇리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서 원망스럽기도 하다. 대체 이의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나 많은 시련을 한 번에 쏟아붓는 것일까. 그것도 왜 하필 지금, 다른 때도 아니고 왜 하필 올시즌일까. 도대체 얼마나 더 괴롭혀야 이 그지같은 절망의 순간이 끝나는 것일까. 실제로 나였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연속으로 닥쳤다면, 난 진즉에 gg치고 하늘에 쌍풕유나 날렸을 것이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그냥 절망에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의리니까. 모질고 가혹한 환경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공을 던져왔던 이의리니까. 이 모든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꼭 건강하게 돌아올 것이다. 절망과 맞다이를 떠서라도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내가 아는 이의리라면 분명 다시 행복한 야구를 할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절망이여, 그를 포기하여라. 니들이 아무리 쓰러뜨리고 싶더라도, 무릎 꿇리고 싶더라도 이의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




매거진의 이전글깨어진 약속, 영원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