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취업해도 될까요?

경단녀의 취업은 신의 영역, 긍정은 나의 영역

by 느닷

전공을 살려 사서로 일하고 싶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서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마다 아기가 아프거나, 시험공고가 없거나,내가 아파 응시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나는 첫째 아이에게 동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째아들의 아토피 때문에 내가 겪은 그간의 고통을 너무 잘 아는 친정과 시댁 식구들 모두 염려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둘째 임신을 만류했다. 친정엄마는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여동생은 둘째까지 태어나면 친정에 발 들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나는 큰아들이 곧 건강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둘째를 가졌다. 다행히 큰아들의 아토피는 서서히 호전되었고 배 속의 아기는 잘 커 주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다고 믿었다. 둘째가 돌 때쯤 되면 다시 사서 공무원 시험도 준비할 수 있으리라는 꿈도 슬쩍 꾸었다.


출산을 일주일 앞두고 산부인과에서 출산 준비 중에 왼쪽 폐에서 무언가 발견되었다. 분만 후 일주일 만에 다시 찍은 폐 사진 속의 그것은 이미 발견 당시보다 두 배의 크기로 커가고 있었다. 폐암이었다. 건강하게 태어나준 둘째 아들과 감사의 기쁨을 제대로 나누기도 전에 갑자기 삼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정신이 없었다. 급히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의사가 수술을 어찌나 서두르는지 급하기가 말도 못 했다. 둘째 낳으면 발도 들이지 말라던 여동생의 엄포가 무색하게 아기들을 친정과 시댁에 한 명씩 떠밀었다. 둘째의 출산을 반대했던 그들에게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사서의 꿈은 또다시 사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큰아들이 엄마에게 가겠다고 울고불고 발버둥 치는 동안 수술 시간은 예정과 다르게 더 당겨졌고 죽을 수도 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 무시 무시한 각서에 서명해 줄 가족이 아직 아무도 병원에 도착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빨리 오라는 염치없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갓 태어난 둘째에게 초유를 일주일밖에 먹이지 못한 것이,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것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한 내 사람들이, 떠오르는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2007년 10월의 서늘한 새벽. 철제 침대에 앉아 나는 유축기로 마지막 모유를 짜서 병원 냉동실에 넣어두고 홀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갓 태어난 둘째에게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어제부터 짜 모았던 초유 5 봉지. 그것을 둘째에게 꼭 먹여달라는 나의 메모는 유서와 비슷했다.

감사하게도 수술이 잘 되었다. 두 아들이 걱정되고 보고 싶었지만 폐병동은 아기들이 들어오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당시 나는 병원 복도 고객용 PC로 싸이월드에 접속해서 여동생이 간간이 올려주는 둘째의 사진을 열어두고 500원짜리 동전 3개가 허락하는 시간만큼 모니터를 쓰다듬었다.


적막한 복도에서 엉겨 붙은 산발에 푸석한 꼴을 하고 나는 끅끅 울음을 삼켰다. 감상에 젖어 엄살이나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 연로한 시어머니는 온종일 뛰어다니는 큰아들의 에너지를 감당할 힘이 없었고, 병환 중인 친정엄마는 신생아를 업을 수도 안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아들들을 내 품에 안아야 했다.


나는 방사선 치료를 하며 빠른 퇴원과 회복을 위해 세상 모든 신을 소환했다. 알라신, 부처님, 하느님, 우주님, 산신령님, 삼신할머니... 누구든 좋으니 나를 무사 귀환시켜 주시면 남은 삶은 이 세상에 쓰임 있는 사람으로 살겠노라고. 감사의 크기만큼 봉사하며 살겠노라고. 그러니 가능한 빠른 응답 바란다고.


세상 모든 만물의 신 덕분인지 나는 아이들 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내 경험상 신은 기습적인 타이밍을 좋아하고, 계산은 정확하신 편이다. 건강이 회복되고 얼마 안 되어 도서관이나 장애인 복지관 등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봉사를 할 기회가 자연스레 생겼다. 아들들이 유치원,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짬을 내어 기꺼이 봉사했다. 당시 내 감사의 크기는 8년이었다.

봉사를 오래 하다 보니 아동극 봉사도 하게 되고, 동화구연 강의 의뢰도 들어왔다. 도서관과 유치원, 문화센터, 복지관 등 시나브로 드나드는 관공서가 늘어났다. 도서관 봉사를 하러 갈 때마다 내다 버린 사서 전공 문제집이 생각났지만 더는 꿈 꾸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좀 더 전문적인 봉사를 하기 위해 독서심리상담사, 독서지도사 자격증 등을 취득하고 공부했다. 그저 스스로의 약속대로 즐겁게 봉사하며 가족들 건강하고, 봉사라는 걸 할 수 있는 지금에 감사했다. 물론 당시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8년의 봉사와 강사 경력이 늦깎이 경단녀의 사서 취업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거란 것을.



폐는 잘 아물었고 10년 뒤에 담당의의 완치 소견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2018년. 나는 정말 우연히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일할 사서를 급구한다는 채용공고를 만났다. 8개월짜리 계약직 공고였지만 면접을 보러 온 경쟁자들의 스펙이 쟁쟁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얼마나 오랜 세월 사서를 꿈꾸며 도서관의 언저리를 맴돌았는지 소상히 읊었다. 나는 41살 늦은 나이에 초보 사서로 채용이 되었다! 드디어 사서가 된 것이다. 계약직 사서 자리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고 나는 이곳에서 사서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폐암에 걸린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곳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나머지 감사의 크기만큼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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