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가방을 열어보니 생강차를 담아 온 텀블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방 한편에 생강차 웅덩이가 생겨있었다. 가방을 비우고 구석구석 닦았지만 하필 그날 수업에 써야 하는 그림책이 젖어있었다. 지갑, 파우치, 열쇠, 손수건, 다이어리... 젖은 물건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그림책 젖은 것이 제일 당황스럽고 아까웠다. 생강과 가죽 가방의 합방으로 탄생한 꼬릿꼬릿한 냄새가 그림책의 몰골을 더욱 볼품없게 만들었다. 가방은 둘째 치고, 오랜 시간 아껴왔던 그림책의 최후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살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닦다 보니 작년에 나처럼 가방에서 쏟아진 물병 때문에 엉엉 울던 호영이가 생각났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뛰어 온 호영이의 가방 안에는 많은 것이 들이 있었다. 핸드폰, 알림장, 일기장, 교과서, 조립형 필통, 포켓몬 수첩.... 등등. 도서관에서 가방을 열던 호영이는 흥건한 가방을 발견하고는 호들 갑스레 놀랐다. 그리고 제일 먼저 집어든 것은 도서관에서 행사 중이었던 '따라 쓰기 대잔치'의 원고지였다. 벌써 이틀째 공들여 따라 쓴 원고. 이제 4줄만 더 쓰면 완성될 소중한 원고. 틀려서 3줄이나 지우고 다시 썼던 그 원고. 고지가 코앞인데 젓어서 찢어진 그 원고를 들여다보며 호영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흥건한 가방 속에 핸드폰, 필통, 수첩, 일기장 다 놔두고 젖어서 귀퉁이가 찢어져버린 원고지만 양손에 받쳐 들고 어쩔 줄 몰라하며 우는 호영이를 달래느라 그날 아주 혼쭐이 났었다. 수건으로 꾹꾹 누르고, 휴지로 톡톡 두드려가며 종이부채로 살살 말려서 테이프로 고이고이 붙여 주었다.
호영이는 어째서 비싼 휴대폰 보다, 좋아해 마지않던 포켓몬 수첩보다 원고지를 더 아까워했던 것일까? 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호영이는 아직 한글이 어려운 1학년이었다.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며 완성도를 높여가던 수고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그 원고지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 고생을 다시 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고, 포기하자니 고지가 코앞이었다. 눈물을 펑펑 쏟을 만하지 않은가? 이렇게 품이 담겨있거나, 품을 들이는 경험에는 늘 감정이 동반된다. 감정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다. 그러니 감정이라는 이야기를 덧입은 물건과 경험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가방에는 어떤 귀한 것이 담겨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