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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Jun 06. 2024

고딩 아들과 같이 요리하는 맛

처음 부엌에서 '요리'라는 것을 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K장녀로서 어릴 때부터였을 것 같다. 대충 15살 정도라 생각해 봐도 30년 넘게 부엌을 드나든 셈이다. 요리를 크게 즐기는 건 아니지만 요리라는 것은 취향과 상관없이 먹고사는데 필수적인 기능인만큼 꾸준히 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요리해 먹는 즐거움도 생겨났다. 휴일이면 고등학생 아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정해 아점을 함께 만들어 먹는 게 소소한 낙이다. 


이번 휴일의 메뉴는 떡볶이. 

"엄마, 뭐부터 준비해야 할까~?"

아들은 질문과 동시에 유튜브에서 떡볶이 특급 레시피 검색에 빠져들었다. 입맛 까다로운 아들님의 취향을 존중하기 위해 양념은 전적으로 아들의 선택에 맡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순서대로 움직였다. 나는 말없이 커피포트 가득히 물을 끓였다. 그리고 냄비를 두 개를 꺼내 한쪽에는 계란 4개를 삶고, 한쪽에는 멸치 육수를 냈다. 요리하는 중간에 필요한 재료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딱 좋기 때문에 맛있고 신속한 요리를 위해서는 순서를 꼼꼼히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얼린 재료는 미리 꺼내 녹여야 하고, 준비하는데 시간이 들어가는 재료는 우선적으로 손봐야 한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냉동실에 얼려둔 다진 마늘 한 덩어리와 떡볶이용 떡, 냉동만두 몇 개를 꺼내 녹였다. 양푼이에는 정수기 물을 받아서 떡을 물에 담갔다. 또 다른 양푼이에 물을 받아서 녹차가루 한 스푼을 풀었다. 다진 마늘과 만두, 떡이 녹기를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에서 어묵과 대파, 양배추를 꺼냈다. 양배추는 필요한 양만 퉁퉁 썰어 녹차 푼 양푼이 물에 담았다. 대략 5분 정도면 잔류농약 등을 흡착하는 성질을 가진 녹차가 양배추를 깨끗하게 해 줄 것이다. 어묵은 통째로 넓은 그릇에 담았다. 커피포트의 물이 딱 시간 맞춰서 다 끓었다. 뜨거운 물을 어묵 그릇에 부어 어묵에 있을지 모를 불순물을 두어 번 헹궈냈다. 


그동안 녹은 떡과 만두를 접시에 옮겨 담고, 헹궈진 어묵도 깨끗한 그릇에 담았다. 시간 맞춰서 멸치 육수가 완성되고, 계란이 다 삶아졌다. 마지막으로 양배추를 흐르는 물에 두어 번 헹궈서 탈탈 털어 대파와 함께 그릇에 담았다. 아들의 떡볶이 레시피 검색도 끝났다. 



아들 녀석이 앞치마를 휘두르고는 다 녹은 다진 마늘 그릇에 고추장, 간장, 설탕 등 각종 양념을 황금비율로 섞어 떡볶이 양념장을 만들었다. 커다란 웍을 꺼내어 멸치육수를 부었다. 아들이 본격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재료준비에 사용되었던 양푼이와 냄비 등을 설거지하며 부엌을 깨끗이 치웠다. 준비해 둔 재료로 떡볶이가 뚝딱 완성되었고 부엌도 정갈해졌다. 단정한 식탁 위의 떡볶이는 당연히 맛있다. 

"역시 아들이 만들어주는 떡볶이가 제일 맛있다~"

아들에게 엄지를 척 들어주자 아들이 씨익 웃으며 뿌듯해한다. 아들도 나도 만족스러운 아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부엌일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협연 같다. 특히 순서가 딱딱 맞아떨어지고, 손발이 척척 맞을 때 행복감이 차오른다. 물론 아름다운 협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연습이 필요했다. 양념을 다 만들었는데 떡이 꽝꽝 얼어있어서 요리를 멈추기도 했고, 떡볶이를 다 만들었는데 삶은 달걀을 깜빡해서 달걀이 삶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역할이 잘 나뉘지 않아 동선이 꼬이거나 부엌이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다. 그런 실수들을 거쳐서 이제는 요리의 한 치 앞을 내다보며 필요한 것들을 말없이도 순서대로 챙길 수 있는 우리가 되었다. 


실수투성이의 삶에서도 요리할 때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 요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듯이 오래오래 살다 보면 가능해질까? 떡볶이 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 지혜롭고 싶은데 인간이라 그런지, 아직 어리석어 그런지 한 치 앞을 모르겠다. 맛있는 떡볶이 앞에서 슬그머니 또 다른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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