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함께 뛰는 러닝크루 단톡방에 불금을 위한 야간러닝 번개모임이 올라왔다. 망설임 없이 참여 버튼에 체크했다. 뛰는 동안은 소란스러운 머릿속의 회오리를 떨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사실 출근길에 가벼운 접촉사고가 있었다. 신호대기 정차 중에 좌회전 신호를 잘못 보고 슬슬 출발하다 앞차를 쿵. 박았다. 늘 다니던 길이었는데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백 퍼센트 나의 과실인 상황. 유명한 체인점 기업의 로고가 큼직하게 프린트되어 있는 회사소유 차였다. 내려서 사과와 함께 괜찮냐는 인사를 건넸다.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분은 괜찮다고 하셨다. 보험사 직원을 부르고 금이 간 범퍼 수리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인사하고 출근길을 서두르는데 보험사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상대방이 인사사고 접수를 추가요청한다고, 수락하겠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병원에 가야 할 만큼의 충격이 가해지지 않았다. 내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라면 가짜환자 행세를 하겠다는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수가를 올리는 수많은 나일론 환자들을 혐오한다. 사회정의를 위해 인사접수를 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온종일 나를 전화기 앞에 붙들어 놓았다. 그 남성은 결국 경찰서에 나를 신고했고, 병원에 진단서를 끊으러 갔다. 경찰서, 보험회사, 사건 담당자 등으로부터 온종일 걸려오는 전화는 침착하려 애쓰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머리를 들쑤셨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험회사와 병원, 경찰은 중립적 태도를 취했지만 은연중에 이런 상황에서 관례적으로 1,2주의 진단서를 충분히 받을 수 있으며 실제 부상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병원을 가는 것이 상식적이라는 류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남성이 실제로 아플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역시 나 만큼이나 기분이 좋지 않을 터이다. 나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오만한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의구현을 한다는 어설픈 명목으로 모든 상황이 나를 옧죄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독여 봐도 나 스스로에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달궈진 머리를 흔들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야간 러닝 번개에 참여한 7인 중 나를 제외한 6인은 철인들이었다! 아뿔싸... 누가 나오는지까지는 생각지 않고 그냥 뛰쳐나간 나의 불찰이다. 그들은 철인 3종에 참가하고 트레일러닝을 밥먹듯이 하는 철인들이었다. 나 따위 런린이가 함께 뛸 자리가 아니었지만 후회하기엔 늦었다. 살살 뛰자고 앓는 소리를 하는 수밖에.
철인들은 배려심이 남달랐다. 런린이를 위해 6.5~7.0이라는 말도 안 되게 느린 속도를 지키며 10킬로를 달려주었다. 철인들을 따라 뛰니 굉장히 안정적인 페이스로 달리는 것이 가능했다. 깜짝 놀랐다. 역시 능력자들! 능력자들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전화통화를 하며 10킬로를 펀런이라 칭했다. SNS게시물도 확인하고, 영상도 찍는다. 뛰면서 말이다. 여유만만한 심장이 부럽다!
한산한 남강변의 야간조명이 강물에 비쳐 화려하게 일렁인다. 끝없이 줄지어 휘황한 진주성 조명을 독차지하며 달리니 천하가 부럽지 않다. 철인들 역시 서울사람들이 이 러닝코스를 보면 입을 쩍 벌린다며 자화자찬을 잊지 않는다. 마침 미세먼지 없이 청아한 공기는 봄이라는 계절에 딱 맞게 보드랍다. 덥지도 춥지도 사람이 많지도 않은 야간 러닝의 기회는 흔치 않다. 운이 좋다. 펀런이 맞는 것 같다. 헉헉대는 내 거친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 얼마나 긴 거리를 달리고 있는 중인지 잊을뻔했다.
철인들은 러닝 철학도 확고하다. 내가 수영도 하고 있다고 말하니 바로 철인 3종경기에 참여하라는 영업이 들어왔다. 트레일러닝도 권한다.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힘든 종목도 아니란다. 이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단다. 아무래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50이 코앞인 내 나이도 늦지 않았다고 한다.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뛰는 그들과 다르게 헉헉대며 대답도 겨우 하고 있는 나는 절대 철인이 될 수 없다고 거듭 말했지만 자신들도 그렇게 대답하다가 결국 철인이 되었다며 3년 뒤 철인이 되어있을 나를 그들끼리 상상하며 흐뭇해했다.
최근 참여했던 남강마라톤 후 햄스트링이 좀 당긴다고 말했더니 좋은 징조라 답한다. 런친자 중에 부상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단다. 누구는 무릎, 누구는 장경인대, 누구는 족저근막염... 앞다퉈 자신의 병명을 읊는다. 심지어 월요일에 물리치료가 예약되어 있다고 말한 그녀는 새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남강변을 달렸다.
계획도 장비도 차원이 다르다. 매일 10~20킬로를 뛰면 정말 살이 찔래야 찔 수 없다는 둥, 일본 후지산 트레일러닝을 신청할 거라는 둥, 지리산과 한라산을 걸어 오르는 것은 심심하다는 둥, 뛰어내려 와야 제맛이라는 둥, 처음 듣는 러닝 전문 브랜드의 신발을 100만 원 주고 사 뒀다는 둥, 아내에게 러닝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가사와 육아에 좀 더 진심이어야 한다는 둥..... 철인들의 신세계를 엿보는 동안 어느새 10킬로를 완주했다. 1시간 6분. 남강마라톤 때만큼 죽도록 힘들지 않았는데 기록이 거의 같다. 아니 즐겁게 대화에 끼여가며 천천히 뛰었는데 기록이 비슷하다. 신기한 노릇이다. 한 분은 집까지 마저 뛰어가겠다며 멈춰선 일행을 뒤로하고 계속 달려나갔다.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마라톤은 진정 마인드싸움인가 보다!
남강의 아름다운 야경에 말랑해진 가슴 속으로 철인들과의 대화가 들어차서 찰랑인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한다. 이들은 프로다. 내일 기어 다니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상책. 내가 좋아하는 러닝을 좋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하니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라면 어쩌면 트레일러닝도, 어쩌면 더 빠른 기록도, 어쩌면 하프 도전도 가능하지 않을까? 미래의 나에게 빵빵한 기대를 하느라 부푼 구름이 되어 집에 도착했다. 물 한 컵 시원하게 들이켜고 거실에 벌렁 드러누우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고개 돌려보니 지난달에 베란다 화분에 심은 감자에 싹이 시원하게 자라있다. 키다리 아스파라거스는 어느새 눈꽃 같은 뽀얀 꽃이 졸졸이 피었다. 싱싱한 대파도 하얀 꽃을 틔웠다. 뱅갈고무나무는 우듬지 옆으로 새 잎사귀가 미어터지게 달려있다. 충직한 반려견 우주가 꼬리를 흔들며 소금기 머금은 내 손을 핥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있다. 아무 문제 없이 나를 감싸고 있다.
경찰도, 보험사도, 사고차량 남성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을 지우니 누구도 깨지 못하는 평화로운 내 세상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헐떡이지 않고 편히 들이쉬는 호흡이 호사스럽다. 허벅지의 뭉근한 근육통이 짜릿하다. 달리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왜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쓰고 있었던가! 사고담당자에게 문자 했다. 인사처리를 해 달라고. 진심으로 죄송하며 그 남성분의 쾌유를 빈다고.
달리기는 내 몸무게와 함께 세상 모든 문제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스트레스 해소 특효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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