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돌이 되기까지

ㅣ 다정한 문신

by 느닷

"사서 선생님은 성격이 정말 좋으신 것 같아요~"

해마다 바뀌는 수많은 봉사자 어머니들과 잘 지내는 내 모습을 보고 한 선생님이 내게 성격이 좋다고 평했다. 맞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잔다. 아무나 하고도 잘 웃고, 어지간하면 다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 다만 이런 까탈없는 성격은 후천적인 고통의 대가를 충분히 치르고 얻어낸 문신 같은 것이다.


‘너도 딱 너 같은 자식 낳아봐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한참 지나고도 대단한 고집불통에 버럭 대장이었던 내게 지친 엄마는 늘 이런 희망 담은 멘트로 갈등을 덮으시곤 했다. 엄마 표현으로 내 젊은 날 성질머리는 보통이 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에 대한 편견과 자만도 못지않았던 것 같다. 부족한 경험만큼 편협하고 경솔했다. 삶이란 마음먹고 열심히 하면 뭐든 다 해낼 수 있는 것이라 만만히 여겼기에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세상에 무릎 꿇고 둥글게 깎인 건 엄마의 오랜 염원대로 자식을 낳으면서다.


‘역아’라서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로 태어난 큰아들은 백일때부터 아토피가 심했다. 아니 심하다는 표현은 아기의 고통을 다 담아내기에 부족하다. 손바닥, 발바닥을 뺀 모든 피부에서 진물이 흘러내렸고, 가려워 긁으면 피딱지가 터지며 이불을 붉게 물들였다. 백일부터 시작된 아토피와의 전쟁은 두 돌에 정점을 찍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굴과 온몸에 흘러내리는 용암 줄기처럼 이리저리 터진 살들이 피딱지가 되었다 진물이 되기를 반복하며 퉁퉁 부어올랐다.


밤새 가려워 우는 녀석을 안고 흔드느라 누워서 잠을 자본 기억이 없다. 제대로 된 밥을 만들어 먹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체력이 한계에 달하면 버스를 타고 2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으로 도망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친정엄마에게 칭얼대는 아들을 떠안기고 기절하듯 잠을 잤다. 그러다 아직 시집 안 간 여동생이 퇴근해 오면 허리 아픈 엄마를 대신해 우는 아기를 안고 흔들었다. 내가 깊은 잠에서 깰 때까지. 엄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워 까맣게 속을 태웠고, 아픈 엄마가 안쓰러웠던 여동생은 내가 친정에 오는 걸 싫어했고, 나는 염치없음에 미안해했다.


가려워 몸부림치며 제 살을 긁어대는 아들의 손을 장갑으로 동여매며 멍하고 배고픈 와중에도 새카맣게 반짝이는 아들의 눈을 보며 동요를 불렀다. 수많은 상처로 붉게 부풀어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볼 때면 대신 아파주지 못하는 어미의 마음은 숨 쉬는 매 순간이 죄인이었다.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 그것은 일평생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아기만큼 힘들기야 하겠나... 나는 눈물을 꾹꾹 접어 깊숙이 밀어 넣고 ‘곰 세 마리’와 ‘섬집 아기’를 밤이 새도록 천 번 만 번 불렀다. 아들은 감사하게도 가렵지 않을 때는 늘 해맑게 웃는 씩씩한 아기였다. 아들은 나의 웃음 선생님이었다. 웃음 선생님은 웃다가도 딱지가 벌어지면 피가 나곤 했다.







아토피는 약이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비싼 일제 이온 정수기를 사고, 모유 수유하는 내가 아기 대신 식이요법을 했다. 특효라는 크림은 또 얼마나 다양하던지 안 사본 크림이 없다. 자연치유 요법 책을 사다 읽고 따라 하기도 했다. 건강에 대한 책을 늘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냉온 요법이 좋다 해서 한겨울에 발가벗겨 베란다에 데리고 나갔다가 따뜻한 피톤치드 물에 담그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만 내 마음에 위안일 뿐 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세상은 지난날 나의 편견과 경솔함을 아들에게 정조준하여 되갚아 주었다.







병원 로비에 앉아있는 우리 모자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하는 아이들은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 저 아기 얼굴이 왜 저래?”

“응,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아무거나 먹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아... 나도 언젠가 누구에게 저렇게 함부로 지껄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내 아들은 밍밍한 이유식도 군말없이 잘 먹는 착한 아기이거늘. 아들이 아직 말 못하는 아기라 얼마나 다행인지.


유황 온천이 좋다는 말에 안동으로, 부산으로 전국을 다녔다. 아토피는 옮는 게 아니 건만 아기의 벗은 몸을 보며 목욕탕의 여인들은 문둥병 환자라도 만난 듯 드러내놓고 불쾌해했다. 당시의 나는 그녀들의 무지함을 묵묵히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주눅이 들어 있었다. 길 가던 할머니가 등에 업은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갑자기 혀를 차며 내 등짝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어미가 돼서 임신하고 뭘 처먹고 돌아다녔길래 애가 이 꼬락서니야~?! 쯧쯧쯧... 나 아는 사람이 오토바이 기름을 바르고 아토피가 싹~ 나았어. 가서 내 말대로 해봐!”

나는 그 이름 모를 할머니가 세상 모두의 시선을 대변하는 것 같아 서럽고 무서웠다. 진짜 오토바이 기름을 사야 하나 잠시 고민할 만큼 지성은 무뎌졌고 감정은 선명한 생채기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임신해서 뭘 하고 돌아다녔을까... 사서가 되고 싶다고 사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만삭의 배는 책상을 버거워했다. 급기야 시험장에서 하혈했고 시험을 제대로 치지 못했다. 시험공부한답시고 아기에게 좋은 음식을 신경 써서 챙겨 먹지 못했던 것 같다.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아들이 아토피에 걸린 걸까? 내 욕심으로 아이를 이리 만든 걸까? 사서가 되고 싶다던 내 꿈은 뻔뻔하고 하찮아졌다.






아픔을 대신해 줄 수 없는 부모의 미안함은 죄책감이 되어 내 가슴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부모라는 자리의 무게는 온 우주를 떠받드는 듯 버거웠지만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소명이었다. 뒤늦게 부모님께 죄송했고, 지난날 함부로 떠들어댄 말들을 후회했다. 나와 같은 문신을 새긴 이들에게 연민과 동지애가 생겨났다. 나는 세상 모든 일에 겸손하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이 28. 아직 아는것이 너무 없는 애같은 에미가 애를 업고 그렇게 매일을 울었다.


다행히 세상은 음지 옆에 양지도 있었다. 동네 소아과 의사 선생님은 늘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

"요 녀석은 증세에 비해 밥도 잘 먹고 예민함이 없는 정말 긍정적인 아이입니다. 요놈 제발로 뛰어다닐 때 쯤 이면 분명 좋아질 겁니다."

아이가 셋이나 있어서 더없이 바빴던 아랫집 그녀는 생면부지의 내게 수시로 밥을 권했다.

"903호 새댁~ 반찬 없지? 나 한가해~ 우리 집 와서 얼른 한 끼 먹고 가~"

온천에서 눈치가 보여 쭈뼛거리는 어리숙한 새댁을 위해 힘내라는 말과 함께 아기용 대야를 챙겨주는 어르신도 있었다. 이웃의 아기 엄마들은 아들을 그냥 이웃집 아기로 대해 주었다. 그들의 다정한 배려는 둥글게 깎이다 못해 뭉그러져 가던 28살의 어린 새댁을 지켜주었다. 그렇게 온몸에 새기듯 배웠다.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서로 긍정과 배려를 주고받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걸.


다행히 의사 선생님 말대로 큰아들은 두 돌이 지나면서 서서히 호전되었다. 지금은 키 185cm에 건장한 대학생이 되어서 대단한 고집으로 엄마의 남은 성질을 동그랗게 깎아주고 있다. 나는 기꺼이 세상에 또 꺾이어 본다. 그렇게 동그랗지만 단단한 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