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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토끼 May 09. 2024

결국 우리는.

글을 쓰게 하는 남자는 나빠

영어스터디에 가면 남자친구 얘기를 종종 하는 편이다.안전한 주제이기도 하고 특히 대화하는 상대가

여성일 경우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쉽다. 하루는 서로에 대해 놀랄만한 정보를 주고 받자고 했었다.

나는 뭘 말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i've been dating my boyfriend for 10 years.'

진짜 거의 십년이 되어가기도 하고 딱히 다른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걸 얘기 했다.

스터디룸에 있던 사람들이 꽤나 놀랐다. 사람들이 내가말한 사실에 놀랐다는 게 조금 재밌었다.

10년.............짧지 않은 시간이지. 남자친구의 존재가 그만큼 자연스럽고 나에겐 그냥 일상인데 하루하루

모아놓고 보니 꽤 놀랄 만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연애얘기에 유독 관심을 보였던 폴란드 여자애에게 이런 말도 했다.

He accepts as i am and i also accept the way he is. We  do everything  together on weenkends.

나에게 오래된 연인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나는 조금 우쭐한 마음이 되어 이런 자랑아닌 자랑도 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문제라고 해봤자 왜 나를 더 사랑해주지 않느냐는 사랑스러운 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토요일이었다.

나의 호르몬의 소용돌이와 해묵은 서운함과 그가 보고 있는 휴대폰. 그렇다. 시작은 늘 휴대폰이다.

나와 있을 때 나를 보지 않고 나와 대화하지 않고 휴대폰을 보는 그를 볼 때면 나는 화도 내보고 정색도 해보고 나좀 봐달라고 얼굴을 드밀어도 봤다. 그렇지만 그가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쇼핑을 하고 포인트를 모으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주말에 함께 휴식할 때 넷플릭스를 보는 게 서운했다. 

밥을 다 먹고 내가 설거지를 할 때 그가 안보이는 게 서운했다. 

나를 더 생각해주고 더 배려해주고 더 사랑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매일 조금씩 자잘한 실망들을 쌓아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가 쌓는 포인트만큼 서운함을 쌓았고 그걸 종종 말했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래서 일요일에 혼자 있기를 선택했다. 

혼자 집에 가고 혼자 가만히 있고 혼자 끼니를 챙겨먹는 그런 일요일이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시간. 내가 그토록 원했던 나만의 시간. 막상 가져보니 너무 별게 없었다. 똑같이 넷플릭스를 보고 출출한 배를 채우고 인스타만 돌아다니며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혼자 있을 때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들으면서 훨씬 유용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혼자 있어보니 둘이 있을 때와 비슷하게 잉여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정했던 많은 약속 중에 싸워도 16시간 안에 연락하기 약속이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냥 헤어지는 거라는 약속. 그 약속은 잘 지켜졌다. 내가 토라져 있어도 언제나 그 다음날 아침이면 문자가 와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지낼 수 있었다.


내가 토라진 날 전화가 오긴 했지만 내 기분이 너무 안좋아서 우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끝이었다.

그의 연락이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다음날도 쉬는 날이었는데 나는 여전히 혼자였고 출근날 아침에도 늘 하는 출근 카톡도 없었고 그렇게 아침 점심 저녁 퇴근 후 운동하는 나의 하루 동안 그에게서 나를 궁금해하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끊임없이 휴대폰을 확인하고 쳐다봐도  NO NOTIFICATION. 


기다리는 카톡은 오지도 않고 눈치없는 친구들 단톡방에서 나는 회신이 가장 빠른 사람이 되었다.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도 않고 쓸데없는 설문조사 전화를 실수로 받아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그냥 전화를 꺼버리지. 그렇게 궁금하면 내가 먼저 해버리지.


중간에 문자를 한번 보내봤는데 다행히 무시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온도는 여전히 알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은 혼자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을 먹고 잠이 드는 단순한 패턴을 반복했다.

그의 연락을 안기다리는 척을 하느라 퀼트 곰돌이를 완성하고 손뜨개 가방을 만들었고 별그대를 다시 봤다.


일어나서 카톡하고 출근할 때 카톡하고 혹시라도 카톡이 없으면 걱정돼서 전화하고 점심 때 카톡하고 저녁을 같이 먹거나 퇴근 때 카톡하고 운동 전에 카톡하고 운동 후에 전화하고 잠자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점심,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오늘 일은 뭘 하는지 저녁엔 누구를 만나는지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아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일주일, 몇번이나 카톡을 열어서 뭐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치만 꾹 참고 그냥 자버렸다. 그가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데는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나에게 연락이 오겠지. 나에게 말해주겠지.


술을 많이 먹었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의 약속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몇번이나 헤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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