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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Jun 11. 2022

그래서 나는 '휴가'를 가기로 결심했다.

:  '방전'되기 전에 '충전'하고 오겠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작품이 나고 나면 무조건 여행을 떠났다.

약 1년 동안 모든 걸 쏟아부은 작품과 '이별'하고,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나를 떨어뜨려 놓으면- 그동안의 일들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을 반복하다 보면 또다시 일할수 있는 용기가 '충전'되곤 했다.


그런데 직장인으로 일하니까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여기가 끝이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거짓말처럼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계속 튀어나온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했지만 직장인으로 일하니까 하고 싶지 않은 작품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났다.


"나 계속 짜증이 나지?"

"마흔 넘어서 운동 안 하니까 기초체력이 떨어져서 짜증이 계속 나는 거야"

그런가? 백 프로 납득은 되는 말이다. 그래서 쉬운 운동부터 시작해보려고 했지만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헉헉- 대고 있노라면 더 짜증이 났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짜증 내는 내 모습에 더 짜증이 났다.


그러다 문득 내가 '방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 나를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일들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서서히 방전되기보다는 직장인으로 조금 더 오래 버티기 위한 '충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휴가'를 가기로 결심했다.




'방전'되기 전에 '충전'하고 오겠습니다.


이번 '휴가'는 프리랜서 때와는 다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과 7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한 작품을 끝내고, '이별'하는 느낌이 아니라 '도망'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비록 '도망'이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다. 


"방전되기 전에 충전하고 오겠습니다!!"

"다녀와다음 작품 들어가면 그땐 더 어려울 듯."

"아직 할 이 많이 남았는데... 가도 될까요?"

"보내줄 때 다녀와~"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그동안 나는 왜 내가 쉬는 게 당연히 안될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휴가를 가기 위한 여정에서 제일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던 '허락'의 산은 의외로 쉽게 넘겼다. 그렇게 내가 휴가를 간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직장 동료들도 과연 내가 무사히 휴가를 갈 수 있을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진짜 가요?"

"진짜 가려고요!"

직장인으로서 첫 휴가- 아니 '도망'이 성공한다면 다음은 그들이 '도전'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런데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나의 여정은 어쩐지 시작부터 전전긍긍이 되었다. 막상 가라고 하니까- 그냥 이대로 '잠적'할지, 아무도 연락할 수 없는 해외로 갈지... 이전과는 다르게 어떻게 충전해야 할지 등등 수많은 고민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일때는 예산을 정해두고, 그 예산 안에서 기간을 정하고, 충분히 준비하고,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만 정해놓고 떠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간이 정해져 있고, 준비할 시간도 짧았다. 그러다 보니 장소부터 예산까지 휴가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보다는 점점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전긍긍을 하다 또 문득, 일을 할 때도 종종 느꼈던 거지만 휴가를 준비하면서까지- 내가 나에게 유독 인색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두 번 세 번 계속 생각하다 보면 생각만 많아진다. 일단, '직장인'이라는 갑옷이 아직까지는 너무 무거우니 멀지 않은 제주도로 결정!! 그리고 '이래도 될까?'라는 생각들은 모두 접어두고! 마음 가는 데로 우선 예약을 완료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휴가기간에 있을지도 모를 일들을 시물레이션 하고, 나를 찾을 일이 없도록 사소한 일들까지 찾아서 정리했다. 분명 똑같이 하기 싫은 일인데도 역시 '마음 문제'였던 걸까? 하루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나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직장인으로 첫 휴가


알람이 울리지 않는 평일 아침, 눈을 떴다. 바야흐로 휴가 첫날이다. 이상하다. 몸이 무거웠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휴가니까. 12시가 다 돼서야 냉장고에 쌓아둔 잔반을 처리하고, 밀린 집안일을 하기 위해 세탁기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세탁기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분명 저번 주만 해도 멀쩡하던 세탁기가 왜 하필 오늘 이러는 걸까? 하지만 괜찮다. 나는 휴가니까.


세탁기를 살리기 위해 두꺼비집까지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했으나 세탁기는 이미 방전이 된 듯 켜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A/S를 신청을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고요하다. 왜 이리 고요하지? 이 고요함이 왜 불안하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휴가기간만이라도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런데 A/S기사님이다. 내일 오전으로 신청을 했건만 기사님이 근처에 계셨는지 10분 후 가도 겠냐고 물으신다. 당연히 괜찮다. 나는 휴가니까.


양손에 007 가방을 든 기사님이 정말 10분만에 도착하셨다. 비장하게 세탁기 뚜껑을 여시는데 욕실에 있는 세탁기라 녹이 많이 슬어 공사가 크다며 수리비가 15만원이 넘는다고 하신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다. 9년 동안 속 번 썩히지 않은 세탁기였으니까. 비록 방전되었지만 이렇게 고칠 수 있으니까. 휴가 첫날부터 세탁기 고장이라니 나는 운이 좋다.


그렇게 세탁기를 고치고, 다음 주에 예약해 둔 건강검진 약을 받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왔다. 오랜만에 병원 공기를 마시며, 내 이름을 불러주길 조용히 기다리는데... <수액 특별 할인행사 중>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금액이 괜찮. 맞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수액을 맡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예정에 없었지만 수액으로도 나를 '충전' 하기로 한다. 


한 시간을 꿈뻑꿈뻑 수액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올 거 같았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어제 TV에서 본 파김치+대패삼겹살 조합을 위해 시장에 들렀다.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밀린 드라마를 틀었다.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렇게 마음 편히 글을 쓰면 되니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첫날이지만!! 이 하루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전'된 것 같은 기분이다.




"고작 몇 개월, 얼마나 일했다고 벌써부터 '방전'이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방전'되는 속도나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 다른 사람들의 속도나 시간에 나를 맞추려고 버티다 보면 '충전'만으로는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직장인이 되고 나니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 생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직장인으로 일 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직장인으로 일하기 위해 깨달은 첫 번째- 내가 '방전'되도록 나를 방치하지 않는 것.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들로 미루고 미루다가 '충전'이 가능한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직장인 에필로그.


"X 부럽다. 네네 회사 좋은 회사인가 봐? 휴가를 이렇게 보내주고!"

"좋은 점만 이야기한 거지. 첫 출근해서 지금까지 주말에도 계속 출근했었어. 그리고...."

"그런데도 괜찮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여러 회사를 다니다 보니 어디나 장단점이 있는... 나는 장점이 많아도 단점 1, 2개가 너무 크면 못 다니겠더라고. 그런데 단점이 아무리 많아도 장점 1, 2개만 크면 다닐만한 이유가 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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