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현 Jul 19. 2023

국룰의 시대

정도에 함몰된 세계, 소수만을 위한 정석 코스가 보통시민의 조건이 되어 가는 세상이 있다. 시류니 국룰이니 정석을 위시하는 표현은 시대를 거쳐 다변하지만, 그 속내는 한결같다. 크게 부각되지 않더라도, 누구와 견주어 완만히 뒤떨어지지 않는 조건과 자격. 겉보기에 빈틈이 없어야 하며, 대다수가 동의한 특정 굴레를 웬만한 과락 없이 밟아간 사람. 이른바 중산층이란 단어로 갈음되는 일원화의 길. 어느덧 일상에 일량 녹아든, 보통 사람들이 되기 위한 하나의 경로가 있다.


정석의 끄나풀은 오랜 기간 매듭짓지 못한 채 현생 곳곳으로 얽혀든다. 비교나 비량에 따른 눈치싸움은 이제 만연하다 못해 당연해졌으니, 누구나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다. 통과의례의 탈을 쓴 경쟁 속에서 분투하다 결핍이 하나라도 드러난다 싶으면 서로에게 낙인(落人)이란 낙인(烙印)을 찍는다. 서로 간을 분절하는 이분화와 양비론은 그렇게 힘을 얻어 몸집을 불려 왔다. 그런 양태가 싫어 방향타를 한껏 꺾어 본들, 이내 일갈이 날아든다. 가치가 정립된 세계에서 독자가 걷는 노선이란 곧 모남을 뜻하니까. 정석의 세계에서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었다.


다수가 살던 좁디좁던 세계 속에서 한 차례의 부침 없이 살아남은 소수의 승자가 있다면, 그보다 넓은 세상에는 경쟁 대신 좌우 간 줄곧 부딪히며 살아온 이도 있다. 부딪히며 자신을 알아가는 사람.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법을 고민하고, 나의 취향과 기호를 면밀히 살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일생 속엔 대개 목적이 녹아 있다, 목표가 아닌 목적. 목적은 ‘주위의 경쟁자를 짓누르고 차근차근 밟고 올라 중산층에 들겠다'와 같이 속계에 만발한 목표들과는 다르다. 단계별로 하나씩 따내는 대상이 아닌, 은은히 나타나는 방향이기에 목적은 보이지 않는 내밀한 밀도를 채워준다.


목표로 점철된 사람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다방면으로 모든 걸 갖춘 듯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본 동공에선 휘황하던 겉치레가 한껏 초라해질 정도로 희멀건 회백색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목적 있는 자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색채를 지녔다. 언뜻 남들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생경하고 뚜렷한 빛깔. 그건 여느 물질로도 치장할 수 없는 안광에서 드러난다. 사회의 굴레 속에서 규칙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방향성을 내비치는 존재들이 내세울 수 있는 눈빛이다. 부딪힘에는 분명 힘이 있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고 부딪힐 때 나의 요령이 생긴다. 주체적인 경험을 녹여낼 때 내게 잘 맞는 방식을 습득해 간다.  


10대 때의 후회와 20대 때의 구회, 30대 시절의 반성이나 40대 시기의 자성. 누가 봐도 정석에 맞게 잘 살아온 듯이 보이던 자가 남기는 회한들이 있다. 남의 말에 휘둘려 일생 꿈꾸던 일에 도전 한 번 못해본 인생을 후회하던 모습. 정해진 길에서의 이탈이 두려워 앞만 보던 지난 날들. 맹목이 주는 경고에는 소리가 없다. 그러니 부딪힘에 미리 두려워할 것 없고, 다가올 부침에 애써 겁먹을 필요 없다. 생체기는 새살로 덮이기 마련이며, 근육은 찢어진 후에야 그 자리를 뒤덮고 성장한다. 고유한 색채를 칠해가는 과정도 동일한 궤를 공유한다. 부딪히고 굴절되며 꺾이기도 해 봐야 보이는 한 틈. 하늘이 파란 이유는 백색광이 대기 속 입자와 부딪힌 끝에 꺾인 결과물이다. 노을이 붉은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고. 굴절보다 속력에서는 빠를 테지만, 직진에는 대개 색채가 없다.


내 길을 찾겠다고 사회가 쌓아온 의례를 저버리는 건 분명 과오에 불과하다. 학창 시절 공부에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 교육 체계의 한계점을 논한다면, 혹은 디지털 세상에서 수기로만 일을 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건 본인만의 합리화에 그치고 만다. 주어진 기준대를 완연히 외면한 아집밖에 되지 못한다. 다만 정신승리에서 끝나지 않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 크고 작은 부딪혀 볼 기회를 만드는 중이다. 나만의 소비, 혼자서의 생각, 부딪히며 늘려가는 자신만의 경험. 동급생의 걸음을, 동년배의 눈치를 살피다 놓쳐버린 탐색의 시간을 복기하는 일. 국룰의 시대가 멋대로 주조한 조형에서 벗어나 나의 룰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국룰의 허영을 이미 알고 있다. 조금만 지나면 유행은 곧바로 뒤바뀌고, 또다시 새롭게 현현하는 대세를 뒤쫓아 달려가니 말이다. 하지만 내 생의 법칙들은 다단한 굴곡을 거친 후에야 겨우 드러날 준비를 마친다. 때에 따라 변하는 유수가 아닌 항시적 존재다. 그러니 조급해할 것도, 눈 가린 채 뒤따라갈 것도 없다. 목적 있는 사람이, 자신의 룰을 아는 자들이 굳이 '남들 다 가진 것 없이도' 여유로운 까닭 또한 이곳에서 나온다.

작가의 이전글 끼리끼리 녹아든다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