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 진심인 자, 골프가 즐거운 자

남편과 나의 얼렁뚱땅 골프 스타일 보고서

by 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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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899188897 (1).png 올해에 두 번 기록한 스크린 골프 홀인원 증서들



이런 젠장!

또 눈치 없이 홀인원을 해버렸다.

하필이면 나의 홀인원은 매번 남편이 유독 골프가 안 되는 날에 터진다.

올해만도 벌써 두 번째다.

보험을 들지도 않았고, 이벤트에 응모한 것도 아니라서

매장 이용 쿠폰 5장이 홀인원 경품의 전부지만, 그게 어딘가!

중요한 건, 나는 남편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환하게 축하해 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남편의 스윙 컨디션을 보고 싶은 것이다.


Resized_20221023_221629.jpg 야간 라운딩 중인 남편의 그림자



<진중하게, 겸손하게 - 남편>


남편은 다방면에 재주가 좀 많은 편이다.

노래도 썩 잘 부르고, 기타 연주도 제법 마음을 울린다.

피아노는 어려서부터 배워서 기본기가 있고, 미적 감각도 뛰어나 그림이나 디자인도 훌륭하다.

글재주도 꽤 좋아서 나의 마음을 참 많이 흔들었다.

하다 못해 당구도 남들과 유쾌하게 즐길 만큼은 칠 줄 안다.

호기심 많고 무언가 새롭게 배우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한 번 뭔가에 몰두하면 끝장을 보는 편이고,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평균 이상은 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자평한다.


그런데 이 골프라는 녀석만큼은 난감하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남편의 속을 어지간히 썩인다.

나보다 조금 먼저 골프를 시작한 남편은 열정적인 노력파이다.

간결하고 멋진 스윙 자세를 위해, 마음에 드는 구질을 만들기 위해, 정교한 퍼팅을 위해...

실내 연습장에서의 연습은 물론, 밤늦도록 거울을 보며 교정을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특히 스윙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예쁘고 깔끔한 스윙 폼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멋진 스윙 폼에 아쉬운 스코어'와, '아쉬운 스윙 폼에 멋진 스코어'...

이 둘 중에 선택하라면 남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택할 것이다.

정말 치열하게 노력했다.

눈물 나도록 치열하게...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듯이 골프도 우리를 참 많이 아프고 속상하게 한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맞던 샷들이 오늘 들어서는 OB와 해저드의 지옥을 번갈아 맛보게 한다.

아이언은 생크의 연속이고, 퍼팅은 홀컵을 사이에 두고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

기어코 입스마저 찾아와 타석에 들어서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남편이 주기적으로 겪는 현상들이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난 어느 날인가는 골프채를 망가뜨리기도 했다.

골프 백을 통째로 근처 냇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 마음을, 힘들고 아픈 그 마음을 나도 충분히 알기에 곁에서 화를 낼 수도 없다.

오죽하면 내가 인터넷에서 '골프 우울증', '골프 입스 극복 방법'... 뭐 이런 것들을 찾아보며

남편 기 살릴 방법은 없는지 고민했을까.

"자기가 골프를 안 쳤다면, 난 벌써 진작에 골프 그만뒀을 거야."

지금도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할 정도로 골프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남편은 골프를 치는 동안은 꽤 진중한 편이다.

빈 스윙도 몇 번 하고, 머릿속에 스윙 궤도도 그려보곤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많이 애쓴다.

그러다 보니, 게임을 맘껏 즐기지는 못한다고 한다.

경기가 다 끝나고 나야, 그제야

'오늘은 좀 공 맞는 맛이 좋았어.'하고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안다. 왜 그런지를.

남편은 골프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태도도 그러하듯, 항상 골프에 있어서도 겸손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지나쳐 자칫 방심하고 교만하면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걸

남편은 지난 몇 년 동안 아프고 또 아프게 배워왔다.

쉽사리 정복하지 못한 단 하나의 큰 산...

그 앞에서 수없이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모른다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오늘도 저기압으로 마무리한 그의 마음을 따듯이 어루만져주고 싶다.





Resized_20230402_173136.jpg 이런 자세로 어떻게 공을 맞히는지 나 자신도 궁금함.


<즐겁게, 씩씩하게 - 나>


남편의 스윙은 아주 간결하고 예쁘다.

하지만 나는 이번 생엔 멋진 스윙 폼은 포기했다.

게다가 나는 자타공인 운동치여서 갈비뼈에 금이 가면서까지 남들보다 참 더디게 배워왔다.

비거리도 평균치보다 한참 모자란다.

스크린 골프 아이디도 '달려라 짤순이'다.

드라이버가 우드보다 안 나가는 날이 태반이고, 아이언으로 100m도 못 보낸다.

골프 이론에도 참 약하다.

어퍼 블로우, 다운 블로우, 코킹, 트랜지션, 샬로우 스윙...

뭐 이런 어려운 용어들 가득한 강의는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몸이 안 따라주니 그럴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골프가 참 즐겁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즐기는 스포츠가 바로 골프다.

왜 그리 즐거운 건지 이유를 묻는다면 딱히 꼬집어 말할 변변한 대답도 없다.

처음엔 내가 골프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사실 예전엔 '골프란 돈 많고 비즈니스상 필요한 사람이나 즐기는 고급 스포츠' 정도로 여겼다.

나처럼 주머니가 폴폴 가벼운 사람에겐 딴 세상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골프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돈도 없고 비즈니스상 골프가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말이다.

그저 운동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내가! 자발적으로!

골프라는 스포츠를 조금씩 익혀간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이언이라는 것을 처음 잡았을 때의 그 어색함,

헤드가 주먹보다도 더 큰 드라이버의 매력,

몇 백 미터나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홀컵 구멍에 몇 번의 시도로 공을 넣는다는 아주 신박한 경기 룰,

그리고 별도의 심판 없이(물론 공식 경기는 엄연히 다르지만) 자율과 양심에 맡기는 진행과 에티켓까지..

골프를 조금씩 알아가고 익혀가며 얻는 즐거움은 매우 쏠쏠했다.


남편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아주 매력적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전혀 다른 스윙 스타일에 대해 터치나 간섭을 별로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골프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건 항상 남편이다.

원 포인트 지도를 받는 셈인데, 이게 아주 신통하다.

눈물이 쏘옥 나올 만큼 속상해 있는 나를 이따금씩 남편은 조심스레 일으켜 준다.

그러면 또 씩씩하게 열심히 클럽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운 좋게 이글이나 버디라도 할 때면 환하게 웃기도 하고...

남편과 함께 취미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말이다.

물론 짜증도 날 때도 있고, 잘 안 되는 날엔 화도 나지만,

그것 또한 골프의 일부라 여기며 날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골프를 즐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건강이 악화되어 클럽을 들지 못할 날이 올 걸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진다.

고개를 저어 본다.

이런 하나마나 한 고민은 털어버리자...

내게는 날 응원하는 남편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먼저 떠난 막내 동생도 생전에 내가 골프 잘 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힘을 내야 하는 이유는 내게 얼마든지 있다.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겠지만, 골프도 우리네 인생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예측 불가능한 싸움이기도 하고, 실패를 끝이 아닌 배움이 기회로 삼아야 하는 점도 그렇다.

알 수 없는 나의 인생을 하루하루 엮어나가듯,

나는 골프를 치면서 마음의 짐도 풀고, 감사해하는 법도 배울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말이다.

음... 그건 그렇고,

오늘은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얼마나 나가려나?

달려라 짤순이, 힘내라 짤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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