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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나의 테두리일까

알베르 카뮈, <이방인>

by 오징쌤

가벼운 번아웃을 겪고 있다. 바이오 리듬이 무너졌고, 피로가 잘 안 풀린다. 평소에는 너끈히 해내던 일도 한참을 미적거리다가 겨우 한다. 몸과 마음을 일 앞으로 데려가는 게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괜히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인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 일을 해내고 나면 무엇이 더 나아지는지 같은 것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기본적으로는 물론 만사가 귀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파고 들어가면, 아마도 이전에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을 나의 테두리 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즈음을 지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테두리 안과 밖을 고민하다 보면 그 테두리를 어디에다 세우는 게 가장 알맞은지 살피게 된다. 결국은 나는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나인지까지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평소에는 바쁘고 귀찮아서 이런 질문까지는 잘 안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방인>은 짧은 소설이다. 고작 13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힘이 아주 세서, 나는 이걸 꽤 오랫동안 곱씹을 것 같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딜 가나 이방인 대접을 받는다.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보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 '습관'일뿐이다. 뫼르소는 남들의 습관을 자기의 습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남들이 자기에 대해서 하는 말에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기 삶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산다. 막 산다는 뜻은 아니다. 철저하게 남의 일은 피하고 자기 일은 챙긴다. 이기적이지도 않다. 자기에게 피해가 안 되는 것 같으면, 남의 부탁도 선선히 들어준다.


그런 뫼르소에게 자신의 테두리를 살펴보게 만드는 일이 계속 생긴다. 엄마가 죽었다. 엄마의 친구들이 관 앞에서 슬피 운다. 뫼르소가 보기에 그건 습관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슬픔이 속에서 우러나서가 아니라 습관 때문에 슬픔을 연기한다고 느껴져서 뫼르소는 관심을 끊는다. 뫼르소는 오히려 엄마 장례식 때문에 사장에게 휴가를 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게 더 신경 쓰인다. 괜한 꼬투리라도 잡혀서 회사에서 잘리면 성가신 일들이 줄줄이 벌어질 테니까 말이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이 사랑하는 개를 잃어버렸다. 그 이웃에게 그 개는 가족만큼 소중했다. 또 다른 이웃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마구 때린다. 그 사람은 경찰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는다. 이런 일들 정도는 쉽게 남의 일로 넘겨버린다. 뫼르소는 남에게 쓸데없이 감정 이입하지 않는다. 그런 건 피곤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조금 정 없어 보일지라도, 차라리 그는 현실적인 조언을 건네는 편이다. 그에게는 남이 가족을 잃거나 처벌을 받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데이트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 뫼르소는 사람을 죽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 날은 햇살이 너무 따가웠고, 더웠다. 그 일로 감옥에 갇힌다. 검사는 뫼르소가 엄마가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걸 보면 언제든 사람을 또 죽일 수 있는 놈이라며 사형을 구형한다. 배심원들과 판사도 생각이 비슷해서, 검사의 구형을 받아들인다. 뫼르소는 죽는 건 싫은지 살짝 힘들어하지만, 그뿐이다. 자신은 사람을 죽였고, 그 죄에 대해 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만 죽음이 지금 닥쳤을 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마라를 다시 못 본다는 사실 정도가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그럼 뫼르소라는 놈은 대체 어떤 일이 벌어져야 진짜 자기 일이라고 생각할까? 어디를 건드려야 꿈쩍이라도 할까?'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궁금증이 풀렸다. 사형 집행 날짜만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교도소 부속 사제가 와서 뫼르소를 건드렸다. 저 세상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죽기 전에 하나님에게 죄를 고백하라는 것이다. 뫼르소는 그럴 생각 없으니 돌아가라고 사제를 여러 번 타이른다.


뫼르소가 보기에 사제는 없는 걸 있다고 믿으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런 쓸데없는 설득을 하느라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쓰게 만든다. 무엇보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신이든 뭐든 간에 맡기지 않는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점에서 모두 평등하며, 그 삶의 주인이 되기로 선택할 특권이 모두에게 있다. 결국 그는 사제의 옳지 않은 오지랖에 맞서 불 같이 화를 내고야 만다.


처음에는 뫼르소의 테두리가 꽤나 희미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이 흘러가는 동안 그는 남들의 습관을 거부함으로써 조금씩 테두리를 선명하게 만들어간다. 그리고 소설 막바지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내세우며 테두리를 완성한다. 이제 그는 비로소 행복해졌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보러 와주기를 희망한다.


칸트는 수많은 경향성(inclination)에서 벗어나 올바름(right)의 기준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 기준은 내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세상 모든 일에 대한 판단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것을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 했다. 카뮈는 칸트나 울프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억지로 합쳐보자면,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다른 무엇에서 벗어나 스스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카뮈가 말하는 '이방인'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씩 싸가지(?)가 없어지고 있다. 내 일이 아니다 싶은 건 좀 더 쉽게 거절하게 된다. 그 시간에 차라리 나에게 중요한 일을 하는 게 백배 낫다. 그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없기도 하다. 나는 이런 내가 좋은데, 내가 만나는 학생들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도 괜찮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방인'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덜 귀찮고 덜 짜증 날 것 같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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