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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Feb 01. 2021

'무엇' 이 '된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지난가을 끄적인 메모들을 발견했다.

그 노트엔 수많은 질문과 좌절, 근원지가 불분명한 낙관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꼭 무엇이 되어야 하나?

무엇이 되면 그때는? 



어릴 땐 사람들 모두가 무엇이 된다고 믿었다. 무엇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나를 나답게 만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라는 말에 깃든 ‘가능성’을 원동력 삼아 달렸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자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무엇’ 보다는 ‘된다’라는 술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내 기준에 이미 무엇이 ‘된’ 듯한 사람들을 보며 나의 재능 없음을 비관했다. 막상 까놓고 보면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었다는 게 더 문제지만. 고백하건대 당시의 나는 열패감과 패배주의에 물든 찌질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되기로 정해져 있다면 조금 편했을까? 꽃이 꽃이 되는 걸 의심하지 않으니까, 감자가 싹을 틔우고 마침내 감자가 되는 건 예견된 일이니까. 그 사이클 안에서 무엇이 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무엇이 되기로 정해져있다한들 최선이라는 디폴트 값이 없으면 ‘된다’는 ‘되고 싶다’로 마무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된다’ 든 간에 중요한 건 그 과정에 있어서 온 정성과 힘을 쏟았느냐 일 것이다. 왜 일을 할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최선을 다한 사람은 내려놓음이 조금 더 수월하다고 하지 않는가. 이루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들만이 무엇이 되는 것에 다가갈 수 있으므로.



그렇담 최선이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해야 내가 내 입으로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내가 뱉은 ‘최선’ 이란 단어를 회수하고 싶게 만드는 글을 발견하긴 했다.

이규리 시인의 시 <특별한 일>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지금까지 내가 뱉은 최선은 ‘위선’을 한 겹 두른 페스츄리 었다. 

눈살 찌푸려지는 얄팍함을 최선이란 단어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었을 뿐.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나에게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가 나와 친해지려는 열망이란 것쯤은 안다. 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 겉돌았는지 알고 있다. 



20대엔 꼭 무엇이 되어야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누가 보기에 그럴싸한 무엇이 되는 데 집착하기보다는 당장 오늘을, 그렇게 매일을 대하는 자세를 만드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여긴다.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과정 중에 있고 그렇기에 엔딩이 의미 없는 사람은 없다. 당장에 무엇이 되었다 한들, (되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엔딩이 어떨지 알 수 없는 것에 비하면 꽤 보증된 결말 같다. 




구병모 작가는 ‘한 스푼의 시간’이라는 소설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두고, ‘그녀의 입에서 터지는 겹자음의 경음은 푸른 멍이 든 자리에 붙인 반창고 같다’라고 썼다. 무엇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쓴 당신의 몸 구석구석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싶다. 그 몸이 간직한 역사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건 동시에 나를 향한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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