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구탱이에서 자도록 허락해줘서 고마워
통계적으로 따지면 나 혼자 살고 있지만, 나보다 집을 오래 지키는 덕팔이의 기준엔 말 그대로 개집에 얹혀사는 동거인의 삶일 뿐이다. 집을 오래 지켜서인가, 덕팔이는 많은 부분에서 본인의 지분을 강하게 주장하고는 한다. 걔다가 장시간 집을 비우고 귀가를 하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의 아이 엄마가 된 친구들이 퇴근길에 '집으로 출근하는 느낌이야'라고 얘기하는걸 나도 이번에는 차용해서 똑같이 얘기하고 싶다. 여하튼 강아지를 키운다는 건 개집에 얹혀사는 느낌 쪽이 좀 더 강하다. 사실상 이 논리대로 따지자면 전세비용은 덕팔이가 9를 내고 나는 1만 내면 되는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 치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애견과의 동거를 환상적으로 생각하는 몇몇 인들을 위해 실상을 나열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침대: 귀퉁이는 내 자리, 중간부터 끝까진 개자리.
잠잘 때 심하게 뒤척이고 구르는 버릇이 있어 퀸, 킹사이즈 침대를 써왔던 나의 삶은 덕팔이와 함께 한 이후로 1평짜리 귀퉁이에서도 잠만 잘 자는 사람으로 완벽하게 변하였다. 내가 어디에서 자든 덕팔이는 본인 엉덩이를 내 얼굴 쪽에, 머리를 내 몸 쪽으로 붙여서 자는 게 습관화되어 있고, 자다가 좁은 느낌에 덕팔이를 조금이라도 밀어내고 편하게 자리를 잡으면 어느새 또 와서 착 붙어있다. 소파에서 잠들 거나하면 내 머리 위에 본인 몸을 목베개처럼 밀착해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든다. 잠만 붙어서 자면 다행인 게, 내 얼굴을 향해있는 덕팔이의 엉덩이에서는 수시로 '푸시식',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방귀 냄새를 얼굴로 뿌려주고는 한다. 강아지 방귀 냄새를 안 맡아본 자... 사람 방귀 냄새 정도로 상상하지 말지어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원하시면 시향 지를 보내드리겠음.
소파: 소파 좌석은 개가 눕는 곳, 소파 곁은 사람이 기대어 앉는 곳.
소파 좌석에 앉아서 TV를 편하게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한국인 국룰을 따라 소파를 등받이로 두고 바닥에 앉는 거 아냐?'라고 묻는다면, 어릴 적 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파는 앉는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그러나 덕팔이가 온 이후로 우리 집 소파는 덕팔이 침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애견 침대와 쿠션을 아무리 사줘봤자 내가 앉는 방석이 될 뿐이다. 슬프고도 억울하다! 큰맘 먹고 비싼 소파도 사봤는데 할부가 끝나가는 5개월 내내 내가 앉은 기억은 5번도 안되는 거 같다.
테이블: 테이블 다리는 개가 쉬하는 곳, 테이블 위는 가끔 사람이 치우고 밥 먹는 곳.
실외 배변견에 가까운 덕팔이는 가끔 실수를 한다. 어디에? 테이블 '다리'에. 그래서인가, 우리 집 흰 테이블 다리는 묘한 아이보리색을 띤다. 구입가는 15만 원이었지만, 약 1년도 안된 현재, 당근에서 무료 나눔 할 목록으로 정리해버렸다. 밥도 편하게 못 먹는다. 덕팔이가 직립 보행하면서 참견하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다가 먹다 남은 과자도 놓기 힘들다. 덕팔이가 팔을 민첩하게 써서 떨어뜨려서 먹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우리 집 테이블에서 나는 밥을 먹은 기억이 전후무후하다. 하하.... 하!
향초: 너와 나의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소품, 그렇지만 인공향이 있으면 안 되므로 사실상 있어도 태우지 못해….
강아지가 있는 집은 묘하게 개 냄새가 스며든다. 냄새에 초특급으로 예민한 나의 성격은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환기하는 거로 시작해서 자기 직전엔 향초가 되었든 향을 태우든 향으로 공기를 가득 채우는 과정으로 마무리되는데 덕팔이가 온 이후로는 그런 거도 없다. 인공향이 강아지의 기관지에 안 좋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는 그냥 자연의 꾸릉내와 군내를 친구 삼아 살기로 결심하였다.
프라모델: 조카만 위험 한주 알았다면....?
당신의 강아지는 프라모델을 좋아해... 특히 어릴수록. 어떻게 아냐고? 그건 묻지 말아 주세요
에어 팟: 귀에서 떨어지는 순간 개껌 자동완성.
덕팔이가 1살이 채 되기 전까지 나는 총 3개 (3짝 아님)의 에어 팟을 덕팔이에게 빼앗긴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에어 팟의 결말은 참담했다. 당근에서 에어 팟 한 짝씩 사모으며 조각모음 해본 사람 있으면 조용히 손을 들어주세요. 그러나 이 악랄한 행위는 정확히 1살이 된 이후로 멈췄다. 1살 이전의 강아지는... 개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귀여움에 속아 에어 팟 세 개 정도는 날려봐야 깨달을 것이다.
길게 쓰지 않겠다.
슬리퍼: 개껌
명품 구두: 질 좋은 개껌
분리수거해둔 물품들: 다양하고 신나는 놀이기구가 있는 에버랜드
이 중에서 2, 3, 4번의 항목은 사실 개춘기 (5개월 ~ 2년 사이의 기간)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인간 소유의 물건으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그 기간 동안의 파손 비용은 대체 어디에 청구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다. 강아지가 집을 다 부숴버렸다고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변호사한테 고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오늘도 세상의 모든 견주들이 힘내길 바랍니다. 견주들은 대단해! 위대해! 멋있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