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혹은 뜨아

차갑거나 뜨겁거나

by Zoey

코비드가 한창이던 2021년 봄에 쓴 글입니다.




자넨 언제부터 커피 했나?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아.. 고3 때부터요. 본격적으로 대학가서는 커피숍 가는 맛에. 정확히는 커피숍 문 열자마자 나는 커피 향이 좋아서. 그리고 브랜드 커피를 들고 있다는 과시욕도 조금 있었지요. 갓 20살이 얼마나 어른이고 싶었겠습니까. 커피를 마시면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지요. 달달한 커피를 사랑하던 합창음악 학도는 어느새 하루에 두세 잔의 블랙커피로 원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유학생이 되었네요.


2014년 여름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생활은 저를 커피 중독자의 길로 안내했습니다. 토플 점수를 내고 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커피숍에서 원서를 읽으며 우아하고 여유롭게 공부하는 유학생의 모습은 상상에만 있었지요. 모두 알고 있듯, 시험영어와 실제 영어는 달랐습니다. 현실은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도 벅찼고, 새벽녘까지 책을 보고 숙제를 하고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뒤쳐지기 일수였습니다. 매번 내가 쓴 글들이 문법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고, 발표 준비도 해야 했기에 주말도 없이 늘 과제에 쫓겨 살았지요 (대부분의 유학생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부모님 집을 떠나 혈혈단신, 아무도 없는 미국에서, 한국인마저 미국 소도시에서 살아남고자 최선을 다했지요. 바다 건너온 유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에 조교 월급까지 주신 교수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겠습니다만, 가장 큰 요인은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 혼자만 한 것이 아니다. 나를 믿어준 그리고 실질적으로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우리 가족들)의 힘으로 왔기에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제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치, 유일한 시간은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이었습니다. 고맙게도 미국은 스타벅스 커피가 저렴한 편입니다 (메뉴에 따라 다르지만, 저는 블랙을 주로 마셔서 그렇습니다). 또 멤버십이 있으면 리필도 가능합니다. 맛의 편차가 매장마다 크지 않고요. 커피 한잔으로 스타벅스는 저만의 작은 도서관이 되어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의 유학생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도서관 아니면 스타벅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핑계 일 수도 있지만, 저는 집보다 밖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내성적이지만, 약간의 관종끼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주로 저녁을 먹고 문 닫을 시간까지 있었는데 (10시 혹은 10시 반, 미국은 일찍 닫습니다), 주로 제가 가던 시간대에 보던 사람들은 저처럼 무언가를 쓰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각자 할 일을 하는 그곳이 저에게는 묘하게도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커피숍을 못 가게 되고 집에 있는 캡슐커피머신으로 주로 커피를 마셨습니다. 박사를 시작하며 블랙프라이데이 딜로 구입했던 것인데 매우 만족하며 쓰고 있었지요. 집에 있으면 시간이 많아서 더 일이 잘 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공간에만 있으니 집중력이 더 흐트러지고 청소할 것들만 눈에 보입니다. 어떻게든 한두 시간이라도 밖에 나가야지라고 맘먹어도 갈 곳이 없기도 하고요. 그러던 와중 지인이 한국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지인은 팬더믹이 시작되면서 브레빌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했지요. 가끔 커피 얻어마시러 (사실은 자주) 갈 때마다 커피맛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가시면서 집을 가끔 봐달라고 하셨습니다. 동네 친구가 한국 가서 아쉽긴 했지만, 커피 마실 생각에 그리고 집안에 계단이 있는 그 집에 왔다 갔다 하려니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커피 한잔씩 내려마시며 논문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역시나 커피빈을 갈 때부터 고소한 커피 향이 온 집안 가득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힐링인데,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는 커피 맛은 아 이게 행복이지, 별것이 행복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유난히 글이 안 써지고 집중이 안 되는 날도 커피 한잔이면 스위치가 딱 켜지듯 뇌의 스위치가 켜지는 듯합니다. 그냥 카페인 중독자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알고 있거든요. 이렇게 커피 원두를 갈고, 커피가루를 압축하고, 샷을 내리는 모든 과정이 그저 힐링입니다. 네스프레소 캡슐로 만족했던 저의 혀는 또 업그레이드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인들끼리 늘 말하거든요, 업그레이드는 쉽지만 다운그레이드는 어렵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렇게 이런 소소한 행복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코로나로 사람을 잘 만나지 않게 되고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는 저로써는 유일한 행복이 커피 내리는 시간입니다. 돈도 없고,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방인으로써 유일하게 멍하니 커피맛만 생각할 수 있달까요. 커피 멍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아와 뜨아를 동시에 내려 차갑고 뜨거운 커피를 벌 갈아 마시다 보면 행복이 별 것 아니구나,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습니다. 이상 커피 중독자의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