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그리고 결혼식을 맞이하며
죽었다. 오래 알던 권사님이. 몇 달 뒤 남편도 돌아가셨다는 소식.
허무맹랑하다. 뭐랄까 태양 항성이 미치도록 커서 지구고 달이고 압도되는 것처럼. 벙 쪄서 그대로 유리창에 머리를 뭍는다.
우리 부모님은 그 권사님 주변 사람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
그치만 돌아가시고 남편까지 두 분을 마지막까지 챙기셨다. 왜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상을 당해봐야 주변 사람이 진짜인지가 나온다고.
엄마 아빠의 숭고한 마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내 마음에 또 흩날리는듯 결국 붙어버린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 말이다.
미국에서 권사님 돈으로 잘 살던 아들 식구네는 장례식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헤매었고, 우리 부모님은 능숙하게 교회에 연락하고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이고 밤을 새며 친가족처럼 마지막을 배웅해드렸다. 입관 직후에 감사하다는 문자, 교회를 한 번은 가보겠다는 그 문자만으로 부모님은 눈을 지긋이 감으며 다행이다-생각하셨더랜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 우리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서 부모님은 그 집안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답장 조차 없었다. '에이 엄마, 아빠, 못 읽은 거 아니야? 미국으로 다시 간 거는 아니구?'
엄마는 카톡으로, 아빠는 문자로 보냈는데 1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이건 쉴드가 안되는데?' 하면서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결혼식이 많이 지난 다음에 부모님이 넌지시 말씀하셨다. 참 황망하네, 최소한 답장은 줘야지.
나는 참 권사님을 좋아했더랜다. 8살 때 함께 간 말레이시아에서도, 28살의 나에게 맑은 웃음을 보이실 때에도.. 내 눈치를 슬금 보시며 남자친구로 소개시켜줄려고 했던 집안이 저런 알량한 사람이었다니?
권사님을 생각하면 어쩐지 쓸쓸하다.
권사님은 70년 넘게 일을 하셨다. 애들 미국 돈 보내주려고 빚 갚으려고 아득 바득 주말에도 일을 하셨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플 때만 만나 뵐 수 있는 약국에 들러 머쓱하게 웃곤 했다. 권사님은 내 할머니와도 같았다.
권사님은 나에게 은색 시계를 선물해주었다. 심지어 나는 타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이어서 만나서 받아보지 못했다. 그 다음엔 병원에 입원하셨기 때문이다. 그게 권사님이 남겨준 유산인 것도 몰랐다. 권사님은 늘 몸을 조심하던 분이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엔 아예 만나뵙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녀를 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권사님은 자꾸만 졸리다고 했다. 자꾸만..
압도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디스거스팅한 이 기분을 아는가. 인류애가 사라지는 기분. 인간을 쥐어짜내면 사실은 피도 안나올거야, 싶은 메마른 기분. 옥색 흰색 큰 금반지와 멋스러운 모자, 깊은 눈망울을 더 크게 보게 했던 돋보기 안경, 평생 약을 만졌지만 고운 손, 힘있고 따듯하게 나를 부르던 목소리. 근데 왜 자꾸만 졸렸던걸까 권사님은. 남편도 없는 그 방에서 권사님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는게, 나는 한동안 너무너무 슬퍼서
뜨거운 여름이면 나는 상자에 감싸놨던 은색 시계를 꺼내기로 했다.
팔목을 시원하게 만드는 은색 시계가 지난한 띄엄띄엄하지만 길었던 우리들의 시간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