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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 Mar 21. 2024

당신에게

할머니의 장례식

3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나보다 3배는 더 산 당신은 내 온 생애동안 함께였습니다.


귀한 첫째 아들의 첫 손녀딸이었던 나는 당신이 보시기에 얼마나 귀했을까요.

실제로 난 귀한 애정과, 관심과, 행복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기억도 안나는 어린 시절,

엄마는 제 첫 옹알이가 엄마도, 아빠도 아닌 '함무' 

당신을 불렀다며 제게 말해주셨습니다.


유치원을 갔다 하원하는 길에는 언제나 당신이 마중을 나와있었고, 당신의 손을 꼭 붙잡고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바로 맞은편 분식집에 들어가 어묵을 사 먹고 들어가던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모님은 저녁 먹기 전에 그렇게 어묵 같은 군것질을 하면 밥을 안 먹는다며 당신께 뭐라고 하기도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에 당신은 마음을 다잡고 몇 번 저를 데리고 그냥 집으로 왔었지만, 그런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어묵 먹고 싶어요.'라고 조르는 제 부탁을 거절하시진 못했습니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늘 당신이 차려주는 밥을 먹었습니다.

아빠와 당신을 꼭 닮은 입맛 탓에 언제나 집에는 괴깃국, 그러니까 곰국이 늘 있었죠.

당신이 곰국에 간을 맞춰주려 타주시던 미원은 msg라며 엄마가 늘 뭐라고 하셨지만 

사실 엄마가 타주는 그냥 소금보다 당신이 타주시던 미원이 더 맛있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도 온전한 제 방이 없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동생과 거실 겸 공용공간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역할놀이를 하며 놀고 저녁에는 당신 옆에서 당신의 손을 잡고 주름지고 거친 손가락을 쓰다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 나를 보며 당신은 팔베개를 해주고, 볼을 쓰다듬어주고, 배를 토닥여줬습니다.





우리가 삐그덕 댄 건, 온전히 나 때문이었겠지요.


사춘기에 예민했던 내게 당신의 관심과 사랑은 싫었고, 필요 없었고, 부담스러웠습니다.

나는 그럴수록 당신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오기를 부렸습니다. 

일부러 상처를 주고 그런 내 행동을 당신의 잘못으로 합리화시켰습니다.


당신이 사춘기였던 내게 했던 어떠한 잘못들을 가지고 당신을 여전히 미워했고,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을 답답해했고,

늙은 당신이 여전히 그 작은방에서 있는 탓에 내 공간이, 내 자리가 없다며 원망해 왔습니다.


나는 커갔고, 당신은 늙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에 대한 감정은 어리고 어리석게도 사춘기 시절 그대로였습니다.


성인이 되고서 당신이 특별히 내게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나는 저 해묵은 감정을 통해서만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당신이 여전히 싫었고 당신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요양원에 가던 날. 

비어버린 당신이 있던 현관문 옆 작은방에는 우리 방을 가득 채우던 몇몇 짐들이 옮겨졌습니다.

나는 그제야 좀 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엄마와 아빠. 나와 동생을 '우리 가족'이라 지칭했고, 당신은 그렇게 내 기억 속 '가족'에서, 내 이야기 속 '가족'에서 사라졌습니다.




몸 상태가 위독해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다는 소식이 두어 번 들린 걸 제외하고는 당신에 대한 소식을 나는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몸상태가 안 좋아졌다가도 당신은 곧 괜찮아져서 다시 요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도 여전히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면 깊은 곳에서 

당신은 지금 가지 않을 것이다. 

근거는 없지만, 당신은 오래 살 것이다.라는 생각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97세의 나이였던 당신이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기에 특별히 걱정도, 소식을 묻지도, 병문안을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전히 나는 소식을 묻지 않았지만, 이번엔 왠지 병문안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당시의 나는 자아 찾기, 상처를 마주 보고 인정하기 같은 것의 필요성에 대해 느끼고 있었을 때인지라 

내 안에 가장 해묵은 감정을 마주 보고, 털어내고 싶었습니다.


참 웃기죠.

그런 생각을 했으면,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면회시간을 물어보고, 병실을 묻고 찾아가면 되는걸

난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워서 계속 가기를 망설였는지

뭐랄까. 

사실 언제든 찾아가도 될 것이라는 안일함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내 내면 깊은 곳엔 당신은 오랫동안 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지난 금요일

잠이 안 와 거실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나는 

새벽 3시 즈음 안방에서 조그맣게 두런두런 통화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을 나서는 엄마를, 나는 자는 척을 하며 가만 지켜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두 번의 경우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당신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당신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을 엄마의 뒤를 따라 병실로 갈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병원으로 가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올까.

지금 따라가면 너무 늦지 않을까.

병실에서 엄마나, 고모를 마주하면 뭐라고 말할까.

어쩌면 당신이 저번처럼 다시 안정화가 돼서 요양원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길고 긴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민이 끝나기 전에, 핸드폰으로 온 문자 한 통에 난 무너졌고, 당신은 떠났습니다.




당신을 보내고, 마무리를 지은 지금.

난 여러 후회들에 밤을 지새웁니다.


아무래도, 그때 그냥 따라가서 얼굴을 볼 걸 그랬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당신과의 마지막 기억은 나는 당신에게 짜증을 내고, 당신은 주눅 들어있는 모습인데,

눈을 감는 마지막, 당신이 기억하는 내 얼굴이, 내 표정이 그렇게 못됐으면 어떡하죠?


아마 당신이 오래 살 것 같다는 근거 없던 내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먹으면 큰일 나는 알고, 밥숟가락 듣고 쫓아다니던 당신이 지금은 이해가 가는데,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는 그저 귀찮았고 짜증만 냈습니다.

화장터에서,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너희를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됐던 거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셨는지 알지?'


글쎄 당신은 아마 조금 서툴렀을 거고, 여리고,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어렸고 어리석고 그 사랑과 사람이 영원할 줄 알았던 오만한 사람이어서

이렇게 죄책감과 후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작은 방에 이제 당신은 없는데, 난 여전히 갈 곳이 없고 숨어 웁니다.


어쩌면 좁은 방, 따라주지 않는 늙은 몸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워졌나요?

세상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당신을 미워하고, 상처 줬던 벌이자 업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과 슬픔에 잠 못 드는 하루가 당분간은 계속되겠지만, 이런 못난 나 또한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니

너무 많이 자책하지 않고

조금 울고, 조금 후회하다가 그리워하고 추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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