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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하 해석>

선과 악, 그 모호한 경계를 말하다

by J refresher


“사바하”는 예상보다 오컬트적 요소가 적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메시지에 힘을 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불교, 기독교 등에서 가져온 모티프를 이용해 포장했다. 내가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이야기 속에서 이용한 종교적 모티프가 바로 와 닫지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이야기를 정리하고, 생각을 나누고자 글을 적어본다.


※ 영화 줄거리와 개인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종교적 모티브는 특정 종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뒤집고, 뒤틀었다.



쌍둥이 설정에 모티브는 '에사오와 야곱'으로 보인다. 첫째인 ‘에시오’과 '그것'은 몸에 염소같이 털이 많다. 그리고 세부적인 내용은 완전히 반대로 설정을 뒤집었다. 형제 → 자매, 형의 뒤꿈치를 잡고 나온 동생 → 동생의 다리를 뜯어먹고 나온 언니, 형의 몫에 축복을 받은 동생 → 언니 대신 죽을 위기에 처한 동생처럼 말이다.


사천왕은 그리스에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모티프를 가지고 왔다. 더 정확하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기에 남아는 부모 살해에 대한 소망을 한다. 동시에 이 때문에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공포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정상적인 사회에 일원, 즉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존재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친부를 살해한다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스핑크스에 수수께끼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대답에서도 그 점이 드러난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스핑크스에 질문에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사람이다.”라고 대답을 했다. ‘짐승’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 인간’이라고, 인간과 짐승을 동일시하는 그의 모습이 사바하 속 ‘짐승’이라고 자신들을 칭하는 사천왕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불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석이란 이름은 제석천(불교의 호법신)에게서, 나한은 나한(불교에서 번뇌가 소멸하여 더는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이르는 말)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숫자 6은 서양권에서는 불완전한 숫자로, 666은 적 그리도를 상징하는 좋지 않은 숫자다. 이와 반대로 중화권에서 6은 "물 흐르듯이 순조롭다."는 뜻을 가진 "流利(liuli)"의 "流(liu)"와 발음이 유사해서 행운에 번호라고 한다. 그리고 뱀, 사슴, 코끼리 등 종교적 의미가 있는 동물들도 등장하고 그 외에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감독이 김 목사의 입을 통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와 비틀어 놓은 지점을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바로 ‘성탄절이 즐거운 날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김 목사는 성탄절이 예수에 탄생이라는 명만 가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아이들에 죽음이라는 암이 동시에 있다고 말한다. 감독은 그 누구보다 “기독교적 이분법”으로 사고하던 김 목사가 “기독교적 이분법”에서 벗어났듯, 관객들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야 “사바하”를 이해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고 말이다.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사고방식으로 작품을 보아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 초반부터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다.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즐거운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작품 속에 완벽한 악마가 있다고 확신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하고, 금화라고 생각하거나 병실에 누워있는 노인을 악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바하”에는 ”검은 사제들”에 “마르 베스”처럼 절대적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결말부를 보고 ‘그것’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금화’에 다리를 뜯어먹고 태어났다. 그리고 초반부에 무당을 뱀에 물리게 하고, 참새들이 창문에 날아와 죽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했다. 소들에 이상행동이나, 부모에 죽음처럼 명확한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부분들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후반부에 내용만으로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을까?


김재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는 81 마군이라고 명명하며, 99년에 태어난 소녀들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양자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살인과 죽음에 나락으로 빠뜨렸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었다. 김재석 덕에 수해를 입은 사람이, 피해를 당한 사람보다 많을 것이다. 김재석은 과연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인가?


김 목사는 어떤 평가를 해야 할까? 그는 이단을 잡아서 사회적 피해를 줄이는 일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스님을 문어라고 부르는 등, 타인에 외모를 비하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데에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막았다고 해서 김 목사가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인가?


금화에 조부모는 어떤가? ‘그것’의 조부모와 조부모는 철저하게 ‘그것’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키우는 개보다 못한 취급을 했다. 축사 같은 곳에 가두고, 쇠사슬로 묶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고, 옷조차 주지 않았다. 밥을 주는 것도 금화를 시킬 뿐, 밥을 주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 금화는 단순한 피해자라고 생각해야 할까? 과연 정상적인 금화는 ‘그것’을 죽이려고 밥에 농약을 타서 줬다. 조부모에 돈을 훔치고 가출을 시도했다. 동정심이 생기고 이해는 되지만, 과연 선한 행동인가? 나한에게 죽기 전에, 자신에 언니도 죽여 달라고 얘기한다. 과연 언니를 죽여 달라는 말 이선 한 행동일까?




나한은 이런 모호한 부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다. 아버지를 죽인 나한은 동정심과 처벌을 동시에 받는다. 나한이 아버지를 죽인 행동은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기에는 모호하다. 나한을 포함한 4 천왕들은 아이들을 죽였기에 악인인가, 아니면 김재석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졌기 때문에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한이 김재석을 죽인 행동은 살인이기에 악인가, 악인을 처벌한 정의인가. 이외에도 사명감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탐하는 종교인(외제 차를 타는 무당과 김 목사, 세속화된 절)은 어떠한가.



현실도 ‘사바하’ 속 모습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욕망으로 가득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 신세대와 기성세대, 남과 여… 이분법적인 사고로 편을 나눠서 싸움이 일어난다. 이 싸움에서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감독은 ‘사바하’를 통해 이분법적인 사회에 의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을까?




※ 완성도에서는 약간 아쉬웠다. 우선 영화에 설명이 너무 많다. 특히 후반부에 티베트 고승이 직접 설정을 말하는 부분은 맥이 빠졌다. 후반부에 나한이 차를 옮겨 타는 부분에서 실수 (과정삭제), 너무나 많은 맥거핀(쓰러지는 소들...)등이 아쉬웠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진지하고 긴장감이 있는 장면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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