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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진수 변호사 Jul 21. 2022

변호사용품#05 반디 사무용 골무

우영우 변호사님은 세 개나 쓰시더라



하루에도 수많은 재판이 이뤄진다. 법정 앞 전자현황판을 보면 10분 단위로 사건이 끼워져있다. 출퇴근 시간 사람들로 빽빽한 지하철같다. 빽빽하지만 각자 개인에게는 소중한 인생이 있듯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사자가 원피고니 사건도 최소 2명의 인생이다. 그것도 가장 뭣같고 힘든 시기의 인생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글로 풀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송에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파생된다.


민사소송은 전자소송이 주를 이루지만, 형사소송은 아직 그렇지 않다. 기록은 대개 1,000페이지 전후이고, 복잡한 사건은 2,000페이지가 넘는다. 대부분 과장님이 가셔서 하나하나 복사를 해오신다. 휴대용 스캐너를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변호사가 되기 전 사무직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검찰에 있는 복사기는 발판이 있다. 먼저 인적사항은 비치된 포스트잍으로 가리고 발로는 페달을 밟아 복사하고 손으로 기록을 넘기는 작업이다. 숙련되면 가끔 먹통이 되는 휴대용 스캐너보다도 빠르게 열람복사가 가능하다.


민사소송은 상대방과 서면을 주고 받으니 놓친 부분이 부각된다. 그러나 형사소송은 다르다. 피드백이 없다. 수사단계에서 받아보는 서면은 결정이나 처분이 적힌 결과지고, 재판단계에서 받아볼 수 있는 서면은 검사님의 의견서를 빼면 판결문뿐이다. 놓친 부분이 없도록 기록을 꼼꼼하게 볼수밖에 없다. 2,000페이지를 낱장으로 넘기는 것도 고역이다. 한 장이 넘어가지 않거나 두 장이 넘어가면 짜증이 난다. 오른손은 메모를 하고 왼손으로 넘겨야 하니 더 죽을 맛이다. 침을 뭍히면 그나마 나은데 비위생적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골무다.


변호사 골무의 대명사, 반디 사무용 골무


변호사 골무의 대명사, 반디 골무다. 사실 변호사만 쓰는 건 아니다. 판사님, 검사님, 수사관님, 계장님, 과장님 다 쓰신다. 반디 골무는 인기스타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장혜성 변호사가 차관우 변호사에게 골무를 선물하는 에피소드에 등장했다. 요즘 핫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5화에서 우영우 변호사님이 손가락에 골무를 세 개를 끼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파란 골무다. 정식명칭은 '반디 사무용 골무'.



솔직히 왜 사무용 골무를 제조, 판매하시는지 이유나 철학이 궁금할 지경이다.



제조회사는 길라씨엔아이 주식회사다. 맨날 쓰는 스테디셀러 골무를 제조하는 회사지만, 포장지의 인쇄 등을 볼때 영세한 기업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회사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길라씨엔아이는 엄청난 회사였다. 회사 스스로 '발명품 전문 생산 기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발명품전문생산기업 길라씨엔아이 주식회사, 반디 사무용 골무


길라씨엔아이의 전신 회사는 1987년 창립됐고, 지식재산권과 동반성장한 기업이다. 주요 연혁으로 2002년 대한민국 특허기술 대전 금상수상(특허청), 2003년 반디도로표지병 건설신기술 인증 372호(건설교통부),  중소기업 기술혁신대전 산업포장수훈(중기청), 반디도로표지병 특허기술대전 금상수상(특허청), 2005년 발명특허 등 지식자산 260여건, 조달청 우수제품선정, 독일 국제 발명전 금상수상, 독일 발명가 협회장 특별상 수상 등을 했다고 한다. 지식재산권 3관왕은 물론 각종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제조회사는 연혁이 정말 화려하다.




반디 사무용 골무의 가격은 2개입 1,000원 안팎이다. 포장지는 단순하다. [세균차단, 사무용 골무]가 적혀있고, 십자가 내 향균이라고 써있는 파란색 표장과 정체모를 마스코트가 그려져있다. 홈페이지도 요즘 것이 아니다. 투박하고 꾸밈이 없다. 제품 소개도 2개뿐이다. 반디 2002 도로표지병과 반디 사무용 골무. 꾸밈이 없다는 말보다 단촐하고 담백하다. 아마 회사 연혁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라성같은 기업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뭔가 실력과 기술로만 승부봐도 자신있다는 기백과 근성이 느껴진다.


사실 반디 사무용 골무는 오래 전 개발된 것이라 이후 신제품이 많이 나왔다. 초박형 실리콘 재질의 골무도 있고, 밴드형으로 손가락에 감아 편하게 사용되는 골무도 있다. 대개 일본산인데 우리나라보다 종이 사용이 월등히 높은 나라 제품이다보니 장점이 많이 존재한다. 색깔도 불투명 파스텔 계열이고, 포장지도 읽진 못하지만 다양한 일본어가 적혀있고 세련된 디자인이다. 문구점에 전시된 골무들 중에 눈에 띄고 실제로 손이 간다. 골무 자체가 비싼 물건은 아니니 예쁜 골무를 한 두개씩 사보기도 했다.




다른 제품을 쓰다가도 결국 손에 익은 반디 사무용 골무를 찾게 된다. 대, 중, 소 사이즈의 감이 너무나 익숙하고, 약간 도톰한 재질과 파란색 컬러, 끼우고 빼기 쉬운 편리함 때문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제조회사의 엄청난 연혁을 알게 됐으니, 반디 골무를 쓸 이유도 하나 더 늘었다. 투박하고 단촐한 외관때문에 제조회사가 그저그런 영세한 기업이라 생각했던 미안함도 있다.


비슷한 경험을 주제로 칼럼을 썼다. 성남지원 구내식당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느낀바가 있어 썼던 글이다. 2년도 더 지났다. 난 아직도 초라한 행색을 보고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마음공부가 아직 덜 됐고 여전히 청년이라 그렇다. 부끄러운 일이다. 조금 지나면 불혹인데 그 땐 좀 나아질까.


그 역사의 현장에서 수십 년간 밥을 지어온 주인아저씨의 삶을 떠올렸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윤오영 작가의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누군가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감동을 빚어낸 셈이다. 다만 내가 낡은 건물을 보고 음식도 맛이 없을 것이라 넘겨짚었던 것처럼, 인생으로 빚어낸 감동들은 초라한 행색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나는 청년이라 믿기에 어떻게 여생을 보낼 것인지 고민이 많다. 그날 먹었던 근사한 한 끼는 내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인생을 들여 빚어낼 수 있는 감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청년들도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2020-07-07 법원 구내식당의 한 끼[2030 세상/도진수]




여하튼 반디 사무용 골무는 계속 생산되고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내 선배들이 사용했고, 내가 사용하고, 후배들이 사용하는 제품. 투박하고 색깔도 촌스럽지만 의뢰인을 위해 한 땀, 한 땀 종이를 넘기는 변호사를 대표하는 물건. 실력과 기술이 있다면 외관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기백과 근성의 상징으로 영원하길 기원한다.



장점

0. 익숙하다.

1. 싸다.

2. 골무가 도톰해서 손가락이 피곤하지 않다.

3. 실리콘 골무에 비해 끼우고 빼기 편리하다.


단점

1. 실리콘 재질이 아니어서 시간이 오래되면 경화된다.

2. 대중소 사이즈에 손가락이 속하지 않는 경우 꽉 맞거나 헐겁다.




추신 : 반디 대표님께서 '제안하기'를 통해 연락을 주셨습니다. 반디 골무는 길라씨엔아이와 연관이 있는 독립된 형태의 회사인 것같습니다. 너무나 영광입니다. 좋은 제품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제품이 영원히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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