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변호사들의 쇼맨쉽은 대단하다. 법대 앞에 서서 핏대를 올려 변론하기도 하고 다양한 검증을 해보이기도 한다. 한 형사 사건 최후변론이 있던 날 양형을 위해 의뢰인의 가족들을 모셨다. '빈센조'라는 드라마가 유행할 즈음이었는데, 의뢰인의 조카가 재판을 방청했다. 재판이 끝나자 그 친구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빈센조 외국법자문사가 법정에서 벌떼를 날리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판국에, 자리에 써서 웅얼웅얼 하는 변론이 재밌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 재판에서 변호사가 이렇게 하면 퇴정 당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재판은 구두변론주의가 원칙이다. 형사소송법 제275조의3에 '공판정에서의 변론은 구두로 하여야 한다.'라고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재판은 그렇게 진행될 수 없다. 사건 수가 워낙 많고 다툴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재판이 엄격한 구두변론주의에 의해 진행된다면 적시 재판을 받는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실제 재판은 기일 전 의견서를 제출하고 그 의견서를 진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예전 변호사님들은 법률서면을 수기 작성하셨을 것이다.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상당히 불편했을 것같다. 반성문이나 탄원서 등을 제외하고 요즘 법률서면은 모두 컴퓨터로 작성한다. 외국과 작업이 많아 워드를 사용하는 법무법인이나 법률사무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변호사님들은한컴오피스를 사용한다. 법원, 검찰, 사법경찰관 모두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군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면서 한글 단축키를 외워야만 했다. 이걸 어디에 써먹을까 싶었는데 평생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변호사는 타인의 인생을 대변해서 글을 쓰다보니 할 말이 많다. 사실관계, 쟁점에 대한 법리, 상대방 측 주장에 대한 반박을 쓰다보면 서면량이 많아 진다. 오죽하면 민사소송규칙으로 분량의 상한을 정해뒀다. 민사소송규칙 제69조의4 제1항은 '준비서면의 분량은 30쪽을 넘어서는 아니 된다. 다만, 제70조제4항에 따라 그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장에 꽉곽 채워서 30쪽을 넘지 않도록 규격도 정해뒀다. 민사소송규칙제4조 2항은 '소송서류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다음 양식에 따라 세워서 적어야 한다. 1. 용지는 A4(가로 210㎜×세로 297㎜) 크기로 하고, 위로부터 45㎜,왼쪽 및 오른쪽으로부터 각각 20㎜, 아래로부터 30㎜(장수 표시 제외)의 여백을 둔다. 2. 글자크기는 12포인트(가로 4.2㎜×세로 4.2㎜) 이상으로 하고, 줄간격은 200% 또는 1.5줄 이상으로 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변호사 업무의 8할은 서면 작성이다. 컴퓨터로 글을 작성하니 항상 쓰는 것이 키보드다. 사실 변호사업은 설비 투자를 할 게 없다. 책상, 의자, 컴퓨터, 프린터, 전화기 정도만 있으면 당장 개업이 가능하다. 소모품처럼 주기적으로 바꿀 것도 없다. 마땅히 바꿀 것이 없으니 눈에 띄는 키보드를 자주 바꾸게 된다. 기계식 키보드의 축을 바꾸는가 하면, 키캡을 주기적으로 바꾸시는 매니아 변호사님도 많다. 나는 매니아는 아니지만, 유선, 무선, 동글식, 블루투스식, 팬타그래프 방식, 기계식 키보드 등을 다양하게 써봤다. 그러다가 변호사업에 안성맞춤인 키보드를 찾게 됐다.
로지텍 MX keys 키보드
나무위키에 따르면, '2019년 9월 3일 로지텍에서 출시한 무선 팬터그래프 키보드. 로지텍의 프리미엄 라인업인 '마스터 시리즈'에 포함되는 제품이다. MX Master 3 마우스와 같은 날 공개되었다. Craft 키보드에서 크라운 다이얼이 제거된 모습을 하고 있고, 경사각이 미세하게 높아졌으며 몸체가 금속 재질로 변경되었다. 연결 방식으로는 2.4GHz 유니파잉 수신기와 블루투스 5.1 두 가지가 존재하며, 컬러는 그라파이트 단일 색상이다. 최대 3개의 기기에 대해 멀티페어링을 지원하고 윈도우, 맥, iOS,안드로이드와 모두 호환된다. 넘버패드 위에는 차례대로 계산기, 화면 캡처(PrtSc), 메뉴, 화면 잠금 버튼이 있다. Fn + Esc 조합으로 상단의 펑션 키 반전 기능을, Fn + B 조합으로 Pause/Break 키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한다.
서면을 쓸 때 주장에 몰입하게 된다. 생각을 문장으로 만든 다음 마침표를 찍을 때 발생하는 쾌감이 있다. 쾌감을 느끼는 한편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면서 엔터를 치게 되는데, 문단 사이에 빈 한 줄을 넣게 되니 엔터는 3번 들어간다. 이때 엔터를 탁탁탁 튀기는 맛이 있다. 기계식 키보드는 '차박차박'한 느낌인데, 튕기는 맛이 적어 아쉽다. 그리고 두께가 있어서 장기간 서면 작성을 하면 손목이 시큰거리는 단점이 있다.
처음 MX keys가 출시됐을 때, '키감이 쫀득하다.'라는 후기에 꽂혔다. 품귀현상이 있어 결국 MX keys를 사지 못하고, 비싼 가격에 다이얼이 달려있는 Craft 모델을 구입했다. 2달 정도 사용하면서 매우 만족했고, 탁탁 튕기는 쾌감을 만끽했다. 어느날 키보드 안에 먼지를 청소하려다가 분해를 시도했다. 팬타그래프 키보드임을 잊고, 무리한 힘을 주어 키캡을 열다가 내부 결합부품이 부러져버렸다. 그래서 다시 MX keys를 구입했다. 약 1년 9개월간 고장없이 잘 쓰고 있다.
구매 내역
MX keys는 사무용 키보드로 대박이 났다. 2019년 하반기 다나와 히트브랜드 일반/사무용 키보드 부문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그 뒤로 후속작이 많이 나왔다. 지금 쓰고 있는 키보드에 너무 만족하고 있어서 따로 알아보진 않았지만, 기계식이고 유니파잉이 아니라 블루투스 또는 로지 볼트로만 연결할 수 있다고 한다. 컴팩트 사이즈 미니키보드도 출시됐다. 한번 바꿔볼까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키보드에 애착이 생겼다.
MX keys를 구입해서 쓴 약 1년 9개월동안 수천 장의 서면을 썼다. 내가 쓴 서면은 누군가의 재산을 지키는데 사용되기도 했고, 무죄를 밝히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키보드에 키스킨을 덮어 사용했다. 키스킨에 누렇게 때가 끼고, 몇 번 교체할만큼 닳아 찢어질 정도로 사용했다. 여러 서면을 작성할 때, 내가 투입한 물리력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누른 것뿐이다. MX keys는 손가락 운동만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만들어준 제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