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바뀌었지만, 삶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Base Life : 기술과 인간

by 도진

지도는 그렸으나 발을 떼지 못했다


지난 몇 달간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대행하는 시대를 탐구하며, 나는 나름대로 정교한 사고의 지도를 그려보려 애썼다. 메타인지와 집중력이라는 도구를 들고 우리가 사수해야 할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나침반을 돌려보기도 했다. 책상 위에서, 그리고 문장 속에서 나의 논리는 질서 정연해 보였다. 적어도 그 속에서는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안도감도 있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 지도를 완성한 뒤에도 나의 일상은 단 1밀리미터도 이동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메타인지를 깨우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더듬는 손길, 엘리베이터 숫자가 바뀌는 짧은 30초를 견디지 못해 잘게 떨리는 발끝. 머릿속으로는 주권과 통찰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의 육체는 여전히 낡고 무거운 습관의 관성 속에 깊게 정박해 있었다. 나는 이해했으나 살지는 못했고, 방향은 알았으나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뇌는 이미 다음 시대로 건너갔다 믿었지만, 나의 몸은 여전히 가속과 효율의 식민지에 남겨진 무력한 포로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서늘하고도 겸허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문제는 내 생각의 부족함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실려 가는 삶, 운반되는 존재


우리는 늘 바쁘게 움직인다. 차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고속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위치를 바꾼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것을 정말 나의 '움직임'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버튼을 누르면 목적지까지 배달되고, 알고리즘이 짜준 최단 경로를 따라 흐르는 나의 하루는 '이동(Mobility)'일지는 몰라도 나의 의지가 담긴 '활동(Activity)'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정해진 궤도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것에 불과했다. 27년간 전략을 짜며 효율을 숭상해 온 대가는 혹독했다. 효율이 높아질수록 나의 신체 감각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자율주행차가 운전대를 가져가고 기술이 우리의 수고로움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생각할 시간뿐만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는 근육'조차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나를 더 완벽하게 운반해 줄수록, 내 삶의 주권은 오히려 희미해졌다. 내 발바닥이 지면과 맞닿는 정직한 진동을 잊고, 근육이 저항하며 뿜어내는 열기를 외면한 채, 나는 안락한 운송 수단 속에서 머리만 비대해진 유령이 되어가고 있었다.


10분간의 정적, 어색한 첫 보폭


변화는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어느 저녁 집 근처의 어색하고 초라한 산책에서 시작되었다. 습관처럼 챙기던 이어폰을 내려놓고 혼자 길을 나섰다. 귓가를 채우던 유튜브의 지식도, 음악이 주는 감미로움도 없는 정적 속에서 나는 지독한 불안을 느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주입하지 않으면 단 10분도 견디지 못하는 나 자신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관성에 장악된 상태였다.


처음 몇 분간의 걸음은 한없이 어색했다. 호흡은 갈 길을 잃고 흩어졌으며,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처리하지 못한 업무와 전략들이 팝업창처럼 튀어 올랐다. "내일 미팅 준비는?", "그 메일에 답장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잡음들을 그냥 둔 채, 나는 오로지 내 발바닥에 닿는 보도블록의 딱딱한 질감에만 집중해 보기로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신기하게도 생각의 소음이 아주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치는 감촉, 목 언저리에 잔뜩 굳어있던 긴장, 그리고 비로소 깊고 고요하게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의 선명한 리듬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생각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대신 몸의 감각을 아주 조금만 일깨워도, 생각은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주권은 머리에서 선포되는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내 몸이 세계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작은 저항과 리듬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향한다


물론, 이 산책의 평화조차 내가 누리는 어떤 조건 덕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10분의 산책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혹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여전히 나의 가슴 한구석은 무겁게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이 기록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비단 '사유의 시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움직일 권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를 물으며 조심스럽게 지성의 지도를 그렸다. 이제 그 지도 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온몸으로 실험해 보려 한다.


걷기, 훈련, 반복되는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피로와 회복의 리듬.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비효율적인 이 물리적 행위들이 어떻게 인공지능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지 탐색할 것이다. 자율주행이 우리를 어디로든 실어 나르는 시대에, 왜 우리는 굳이 제 발로 걸으며 길을 잃어야 하는지, 수치화된 데이터가 아닌 '놀이'로서의 신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사색을 이어가려 한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오늘 어디로 이동했는가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무엇을 움직였는가. 머리로 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몸으로 살아내지 않는 주권은 여전히 위태로운 가설일 뿐이다.


그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살아있음'을 향한 전환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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