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신 공감

독신으로 산다는 것 49
-고양이 입양에 대한 상념들

by 월영

거의 2~3년째 고양이 입양을 알아보고 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이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임을 반복 중이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연애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기에 고양이도 마찬가지. 그저 혼자 살아 적적하니 애완동물이나 한 마리 키우면서 정서적인 허기를 채워보려는 심리가 아닌가 계속 검증하고 있다. 그 검증이 나 스스로 하는 것이기에 주관적이고 변덕스럽다. 해서 시간만 흘렀다.


동물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비교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애완동물, 반려동물 자체에 대한 반감은 딱히 없지만 반려동물 또한 같이 사는 인간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는 점이 불편할 때가 있다. 부잣집 반려동물이란 이유로 아직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무언가 과도하게 느낄만한 특혜를 받는 경우를 왕왕 봐서다. 또한 유기되는 동물들을 보면 심사가 복잡하다 나 역시 어떠한 불가피한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키우는 동물을 위해 나의 무언가를 희생할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해서다. 사람과 사람이 결혼해서도 서로 싫다고 이혼하기도 쉬운 세상인데 동물은 오죽하랴.


게다가 고양이 입양을 위해 각종 입양 사이트를 눈팅하면서 안타까움도 더해졌다. 우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그리고 입양 사이트에 올라온 여러 글들을 읽어보면 또 감수성이 여린 여성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고양이에 너무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경우도 적지 않다. 개중 흔한 게 고양이 싫어하는 노인들이 고양이를 동네에서 쫓아내려 할 때 반응이다.


여린 생명에 대한 폭력이라는 지점에서는 비난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저 그 행동 하나만으로 한 명의 인격을 또 집단으로 무시하고 경멸하는 분위기도 공감하긴 어렵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고 고양이가 반려동물 혹은 애완동물이란 문화를 접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짐승은 짐승. 이런 사고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맥락과 배경도 있을 텐데 이에 대한 연민은 또 없다. 발정기의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런 길고양이의 습성까지 이해하며 살기에 여유로운 사회라면 좋겠지만 한국의 사회가 어디 그런가. 피곤에 지쳐 들어온 집에서 동네 길고양이가 발정 나 아기 울음소리를 내고 있으면 응당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여리고 말 못 하는 생명에 대한 연민도 중요하지만 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동물을 여유롭게 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하게 돌아가는 구조에 대해서도 놓치면 안된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면 고양이 입양은 계속 이렇게 눈팅만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어느새 베란다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치웠고 건조기를 샀으며 또 식기건조기도 샀다. 고양이와 함께 살 때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내다 버리거나 구조를 조정하고 있다. 또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밥도 간혹 주면서 녀석들의 생태라던가 혹은 알레르기 같은 것도 체크해보고 있다.


굳이 인간이란 한자풀이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관계란 결국 반응이다. 나의 신호들에 반응하는 이가 없는 상황. 이것이 외로움의 본질이다. 서로 반응하며 사회성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 안에서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만족을 느끼는 게 삶의 요체다. 그래서 가족이 생겼고 가족을 이루려 한다. 혼자 살 때 가장 힘든 점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사적 공간에 왔을 때 정작 이 공간 안에서 아무도 반응하는 관계가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들이다. 그것이 '편하다'는 말로 각색은 되어도 본질을 속이지는 못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인간의 본질이라 해도 그것을 외치셨던 부처님 또한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열반에 드셨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정서적 반응의 존재에 대한 갈망이 있다. 나의 감정에 반응을 하는 생명체가 한 공간 안에서 같이 지낸다는 그 사실 하나가 또 삶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희로애락을 준다. 아무리 인터넷을 통해 댓글들을 주고받아도 가슴이 뛰고 피가 돌며 눈빛이 영롱한 생명체가 지금 바로 이 순간 주는 정서적 반응과 교감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생명과 시공간을 공유하며 느끼는 삶의 현재성과 동시성. 그것은 또 신이 인간에게 선물하신 천지창조의 비의 중 하나다.


지금까지 인연도 제대로 찾지 못했는데 아니면 놓쳤는데 이른바 '묘연'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마흔 넘은 이 나이에 부와 명예, 사회적 명성 이런 거에 신경 쓰기보다 고양이 한 마리 입양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이 순간이 어찌 보면 복 받은 것일 수 있다. 사실 인생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뭔가 여유가 있으니 가능한 고민이라 그렇다.


게다가 누군가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 있는 고양이겠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고민을 해본다는 것 자체가 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고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 중 하나를 더하는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당장 먹고사는 걸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기에 고양이에 눈길을 돌리는 걸 부정하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 아파트 단지에 고양이 전용 참치캔과 닭가슴살, 사료를 들고 돌아다니며 임시 '캣 대디'를 한 결과 근처에 사는 길 고양이가 최소 9마리 되는 걸로 파악했다. 그중에 두 녀석은 분명 지난봄에 밤새 발정 난 울음소리로 아파트 주민들을 괴롭혔던 녀석임에 분명하다. 그 녀석들이 새끼를 낳았고 그 새끼 들 중에는 얼핏 닮아 보인 검은색 턱시도 고양이가 있었고 또 삼 색 이도 있었고 치즈도 있었다.


고양이를 입양할지 아니할지 아직 결론 내리지 못하겠다. 생명을 데리고 오는 일에는 응당 책임이 있어야 하고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지 않는 게 낫다. 만약 고양이를 집에 들였을 때 생기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동네 길고양이들을 잘 챙겨주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생기고 미련은 남는다. 고양이와 동거보다는 연애가 더 바람직하다고 내면의 메아리가 울리지만 고양이는 고양이 대로 매력이 있다. 연애와 고양이는 등치 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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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민을 또 나 혼자만 하지는 아니했을 터. 고민 끝에 누군가는 고양이를 입양해 묘연의 애환을 누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 끝내 묘연의 오묘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되던지 간에 고양이를 통해 두서없던 상념을 정리한 게 나에겐 중요하다. 이렇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알려했고 상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세상은 또 한 뼘쯤은 넓어졌으니까. 부자가 별건가. 자신의 인지하는 세계가 넓고 깊고 풍부한 게 부자다. 어차피 돈 벌어 부자 될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이렇게 마음과 인식의 부자로 사는 것. 어찌 보면 홀로 사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혜택이기도 하다. 누구의 남편, 아내, 부모로 살다 보면 종종 놓쳐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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