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산행을 할 때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은 능선 위를 찬찬히 걸을 때였다. 하염없는 능선을 크게 숨차지 않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마냥 걸을 때. 그 길이 끝이 나지 않기를 바랄 때가 많았다.
어느덧 마흔이 넘은 지금. 돌이켜 보건대 요즘처럼 순탄한 시기는 없었다. 일단 주거가 오랫동안 안정됐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오기 전까지 최소 1년 반마다 이사를 다녔다. 직장을 잡은 이후를 기준으로 해도 8번 집을 옮겼다. 그런데 2011년부터는 이사를 다니지 않았다. 한 집에서 4~5년 이상 산 게 생애 처음이다. 유년시절 이사에 대한 적잖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던 터라 다소 무리를 해서 집을 샀고 결국 그 덕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정규직으로 밥을 벌어먹기 시작한 지도 십여 년을 훌쩍 넘겼다. 지금 직장에서는 어느새 장기근속자로 불린다. 회사 생활이 마냥 즐겁거나 보람차지는 않을지라도 꼬박 월급 나오고 업무 자체에 드는 품도 전보다는 수월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서에서의 고생도 이제는 술자리에서 웃으며 털어놓을 수 있는 무용담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인간관계에서 딱히 애먹는 일도 거의 없다. 마흔 초입에 늦게 시작했던 연애가 깨지면서 내상을 크게 입긴 했어도 전처럼 극적이고 청승맞은 심리가 오래가진 않았다. 그저 지그시 오랫동안 묵묵하게 견딜 정도로만 아프긴 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형제가 무탈하고 가까운 지인들도 저마다의 삶을 잘 살고 있다. 나를 직접적으로 피곤하게 하는 사람도 없다. 애닮픈, 설렌 사람도 없고.
경제적인 상황을 보면 대출 갚는다고 징징거리곤 있지만 혼자 사는 남자가 가벼운 사치를 부릴 정도는 된다. 몇 년 동안 휴가 때마다 유럽을 다녀왔고 부모님 모시고 일본과 중국, 베트남도 다녀왔다. 2007년 중고차로 첫 차를 산 이후 중고차지만 계속 더 비싼 차를 사 왔다. 책을 사서 보는데 지갑이 부족하지 않고 한때 산행에 몰입할 무렵 사놓은 등산장비는 창고를 가득 채울 정도다. 내가 먹는 한 끼 식사에 몇 만 원 정도는 아쉽지 않게 종종 지불한다.
즉 지금의 내 인생은 평탄한 능선길처럼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악에 받쳐 무엇을 하지 않아도 유지가 되고 있으니 실은 감사하고 고맙고 감읍할 일이다. 반면 이렇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멍하니 홀로 궁리하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분명 10년 전에 비해 내 인생은 여러 모로 안정적이고 풍요로워졌다. 그런데도 가끔은 남과 비교해 괜히 우울하거나 혹은 우쭐해한다.
예전에는 감정의 순도가 높았다. 좋으면 좋았고 싫으면 싫었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웠다. 거기서부터 달라진 듯하다. 어느 때부터 감정은 점점 혼탁해져 순도를 잴 수가 없고 게다가 생각의 일관성도 없어지고 있다. 그런 분열과 분화가 현실의 이전투구를 견디어 낼 수 있는 방어기제인 건지 아니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 헛된 것들을 추구하는데 따른 부작용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능선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 능선의 끝에는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놓여있건 간에 지금은 그저 그 길이 완만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완만한 길을 걸어야 호흡이 가쁘지 않고 주변의 온갖 풍경들을 만끽할 수 있다. 산행은 그저 산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이 아니라 산길을 걸으며 온갖 것들의 순리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함께 숨 쉬는 일임을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