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공감
5년전에 쓴 글을 다시 올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기간 중에 책을 냈고 반려인 대신 반려묘와 함께 지금을 살고 있다.
서른과 마흔. 이렇게 10년 단위로 나이를 먹는게 확연해진다. 혹시나 마흔을 앞두고 심란한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공감을. 이렇게 2020년 상반기의 마지막 금요일이 지나간다.
1.
올해 상반기가 지나면서야 비로소 ‘마흔’을 부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만으로 아직 38세9개월이나 생물학적으로 살아온 기간만을 나이로 셈하지 않기에 1976년생은 올해 한국 사회에서 무조건 마흔 살. 청년이 아닌 중년에 접어드는 시기. ‘서른 즈음에’를 부르기가 멋쩍어 진 나이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결혼한 친구들은 올해 아이들이 성년이기도 하고.
2.
마흔 즈음이 되자 노화와 죽음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상념이 커졌다. 평균연령이 내게 허락된 물리적인 기간이라 할 때 이제 반을 살아왔다. 아홉 살 때까지의 기억이 구체적이지 않으니 얼추 내 안에는 30여년어치의 기억이 내장돼 있다. 이것을 가끔 되돌려보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진다.
‘그 길지 않은 느낌’을 앞으로 반복하면 내 삶 역시 소멸할 것이다. 종교가 있으니 내세를 믿는다지만 그건 심판하시는 분의 몫. 그 길지 않은 느낌의 기간 동안 나는 내 주변의 소중한 인연들과 이별을 해야 할 것이고 또 내가 그들과 이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갈수록 떨어진다는 것을 안다. 이제 밤 10시만 되면 자판을 치는 손가락에도 힘이 빠져 오타가 더 많아진다. 이 쇠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터. 이렇게 내안의 내가 스물 스물 빠져나가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3.
그래서였을까. 지난해 초부터 이제 짝사랑에서 벗어나 연애다운 연애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운 좋게 무슨 복인지 몰라도 처음 봤을 때 요즘 말로 처음 본 순간 ‘심쿵’한 이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됐다. 회사에서는 지난 해 가을 국수를 먹는 게 아니냐는 뒷이야기가 돌기도 했단다.
4.
“결혼을 왜 하고 싶은데요?” 묻는 말에 구체적인 답을 하지는 못했다. “사랑하니까요”라는 답은 1더하기 1은 2라는 정답처럼 당연한 것. 그 이상의 무엇에 대해 궁금해 했다. 우리는 십대도, 이십대도, 삼십대도 아닌 마흔을 목전에 둔 성인. 세상을 알 만큼 알고 혹은 세상을 알 만큼 안다고 남들이 지레 짐작하는 나이. 그런데 아직 내 언어로 답할 수 없는 게 많았다. 게다가 머릿속으로 숱한 정보와 지식과 주변의 조언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어도 그녀가 건넨 말의 의미를 제대로 솎아내지 못했다.
5.
결과적으로 마흔살이 돼도 내 안에 남이 제대로 들어와 있을 만한 여유로운 공간이 부족해서 그 사람이 힘들었을 것이다. 스물 스물 빠져 나간 것이 나라고 여겼지만 아직도 내 고집이 남았고 내 욕심이 남아 넓고 편하고 아늑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6.
그럼에도 그 빈 공간은 분명히 존재하기에 이 공허함을 홀로 술을 마시며 채우려다 말고 글로 끼적인다. 이렇게 찬찬히 가만히 한 글자 한 글자 채우는 것이 곧 치유이고 위로라는 것을.
나 또한 누군가가 남긴 치유와 위로를 보고 이만큼 왔다는 것을 마흔이 다시금 확인해주어서다. 비록 자기연민이 취기를 대신해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부끄럽고 쑥스러워 할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