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면 어색하지. 근데 그렇게 끝? 그건 아니지
흉내쟁이 민달팽이(Exemlar Limax)를 알고 있나?
모른다. 아니, 몰랐다. 부위와 상관없이 신체의 일부를 먹으면 해당 개체의 모습을 모방할 수 있는 '흉내쟁이 민달팽이'는 해당 작품에 등장하는 신비동물이니,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다. <아가씨와 유모>는 흉내쟁이 민달팽이를 이용하려 하는 재력가와 이를 막고자 유모로 분한 학자의 대치를 깔끔하고 단정한 작화로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신비동물의 상징성
“신비동물 연구를 계속할수록 조금씩 욕심이 생겼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새로운 학문의 시작을 열 수 있을 거라는 기대.”(9화 중 일부)
학자는 어릴 적부터 신비동물의 세계에 매혹되었다. 학계에 입문하여 매진한 분야 역시 신비동물의 생태였으나, 어디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에 오기와 집념으로 책을 출간했다. 새로운 분야의 개척은 업종을 불문하고 통용되는 목표일 것이다. 학자 역시 세상이 신비동물의 존재를 인정하길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대량의 학살, 어김없이 등장하는 프릭 쇼(Freak-Show)로 인해 신비동물은 온갖 위험에 노출되었고, 돈벌이의 기회를 노리고 접근하는 무뢰배들에게 시달린다. 그러던 중, 죽은 딸을 대신할 흉내쟁이 민달팽이의 양육에 힘을 보태 달라는 어느 재력가의 편지를 받는다. 끔찍한 발상에 기겁한 학자는 신비동물의 탈출과 안녕을 위해 재력가의 집에서 유모로 일하기로 한다.
<아가씨와 유모>는 이형(異形)의 생물을 관찰하는 학자이자 보살피는 유모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해당 작품 속 신비동물은 학자의 책에 의해 도구로서, 유희로서 혹사당한다. 따라서 불안과 분노, 회한이나 죄책감은 전적으로 학자의 몫이 되지만, 작품을 보는 이들도 이 감정으로부터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신비동물은 그저 새롭고 낯선, 효용 가치가 있는 콘텐츠(Contents)로 통하고, 지금 여기는 콘텐츠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선을 넘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관계의 진전
신비동물의 생태라는 책의 등장이 그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선이란 관계 내에서 굳이 건드리지 않는 영역, 혹은 관습의 테두리를 의미한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나이와 직업, 출신, 가정사에 대한 질문을 삼가는 건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다. 불편함과 새로움의 여파는 비례한다. 불편하다는 건 낯설다는 뜻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동반한다. 사안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태도를 결정해야 할 테지만, 입장과 상관없이 '선'을 넘어야만 변화가 시작된다는 건 분명하다. 암묵적인 선의 안쪽은 안락하다. 그러나 자극 없는 평온은 지루함을 낳고, 이는 도태로 이어진다. 허울뿐인 위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관계의 진전과 퇴보는 선을 넘는 질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 바깥에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기술을 전파하며 의지를 피력해야만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포스타입(POSTYPE)은 기존의 플랫폼들과는 다른 운영방식을 가지고 있다. 내부적 논의와 승인 이후, 원고를 통한 수익 발생이 가능한 구조가 아닌 작가 스스로 원고를 완성하고 판매하며, 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흐름을 낯설게 재구성하여 새로운 관점을 건네는 것을 콘텐츠라고 한다면, 독특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포스타입은 일종의 '신비동물'의 군집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랫폼의 규율과 질서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본인들만의 세상을 거침없이 꾸려나갈 수 있는 오픈 플랫폼의 생태계는 대중에게도 신선한 재미를 전한다.
<아가씨와 유모>는 신비동물에 얽힌 인간의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하였다. 이들을 보는 다양한 시선과 관점은 콘텐츠를 대하는 대중의 태도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포스타입이라는 새로운 생태계에서 연재 중인 <아가씨와 유모>는 단순한 진리를 내세워 다양한 입장을 전한다. 판단은 대중의 몫이다. 신비동물을, 또 콘텐츠를 대하는 당신은 어떤 마음인가. 그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아가씨와 유모>의 갈등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다. 존재의 향방, 입장의 결말에 대한 진중한 기록이 될 해당 작품을 함께 들여다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