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백서
이번 글을 직장 주니어에게 독백형식으로 전하기 위해 쓴 글로 높임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반말로 쓰게 된 점양해 부탁 드립니다.
어느날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가 상담을 요청해왔다.
“차장님. 제가 생각했던 일이랑 좀 달라서 고민이에요. 제 커리어에도 별다른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이 재미가 없어요.저도 차장님처럼 서비스기획 일을 하고 싶어요. “
취업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학생 시절에 생각했던 낭만적인 직장인은 모습은 허상(?)이었음을 느끼게 되는 직장생활 이삼 년차.. 일의 의미를 모른 채 이것 저것 선배들이 시키는 일만 하다 보니 자연스레 드는생각.. “이런 직장 생활이 아니었는데.. “라는 후회..
직장이 천직으로 주어지지 않는 한 대부분의 직장인은 스스로의 선택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주어지는직장생활이라는 긴 여정에서 길을 걷다 보면 GOD의 노래 가사처럼 “나는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내 꿈은 이뤄질까?” 혼란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들 나를 인정해주고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폼 나는 일을 하고있는 나.. 나도 한때 그런 이상적인 직장생활에 대한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이 허상이었음을 아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폼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서비스기획이라는 직무를 선택했던 것 같다. 뭔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뒤바꿀만한 서비스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프로젝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일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도 한 몫을 했다. 그런데 막상 일해보니 기획이라는 일은 결코 폼 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박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회의실에서 꺼내면 동료들이나 상사들에게 기술이나 이슈 측면에서 이래 저래 공격 당하기 일쑤였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도 기본적인 개발 지식이 부족해서 개발자에게 추궁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회의의 주도는 고사하고 하는 일이라고는 파워포인트로 스토리보드라는 화면 그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클라이언트나 경영진은 이래라(?) 저래라(?) 요구사항을하루가 다르게 변경하는 탓에 남 일 해주는 일로 느껴져서 깊은 회의감이 찾아 들었다. 기획이란 일은내가 기대했던 만큼 폼 나지도 멋지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폼 나는 기획은 없었다. 그리고 기획이라 생각했던 업무와는 다른 일들이 주어졌다. 그 중에 하나가 서비스의 운영과 고객 문의 처리였다. 당시 위치기반서비스인 “친구찾기” 서비스를 운영할 때에는 위치정보를 악용하는 사례들 때문에 강성인 고객 불만이 많았고 그걸 처리하기 위해 몇시간 동안 사용자가 통화하는 일도 잦았다. 이런 일이 겹쳐질수록 “난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은 깊어갔다.
이런 번민과 방황의 과정을 거쳐 기획이란 일을 꽤 오래 했더니 그래도 운 좋게 기획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기획 일을 해보고 싶은 후배들은 경영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대형 컨퍼런스에서 연사로 발표하고 언론 인터뷰를 하며많은 이들이 참석한 회의 석상에서 회의를 주도하는 내 모습을 보고 닮고 싶어한다. 멋있기 위해 하는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내 일이 그들에게는 멋져 보이고 폼 나는 것 같다.
이 일 저 일 막 해야 했던 그 시절을 지금 돌아보니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그 답은 금방 나온다.
“그때의 나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폼 나는 기획 일을 하고 싶었지만 기획이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뭘 알고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기획이라는 큰 그림을 그릴 줄도몰랐고 그렇다고 디테일(?) 하지도 못했다. 혼자 일을 주도하길원했지 프로젝트 조직을 이끌거나 일을 끌어나가지 못했다.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도 당장 그 회사 안에서만큼은 제대로 해결하거나 끝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리더나 경영진은 나를 이일 저일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입장을 바꿔 내가 후배에게 업무를 시킬 때도 그들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않다. 후배가 뭔가를 제대로 끝내고 해결한다면 그 일만을 전담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이 일과 저 일을 섞여서 시킬 수 밖에 없고 제대로 마무리되는지 챙기고 해결해줘야 한다. 일의 질 보다일의 양에 의존시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일들은 잡다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들이다.
당신에게 무의미한 일을 계속 던진다면 조직이 문제가 있거나 당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만약 후자라면 “당신이 어떤 일을 맡기기에는 제대로 완수하지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자문해보자. 그질문에 객관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라고 확신한다면 그것은 조직 문제이며 그렇다면 과감하게이직을 하라. 그것만이 당신의 커리어를 위한 답이다.
일이란 무엇일까? 난 이렇게 정의한다. 일은 해결해야 할 대상이있고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직무라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들은 일의 대상만을 생각한다. 당연히 일의 대상도알아야 한다. 그런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일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비즈니스상황, 조직 변화, 그리고 이직이나 승진이라는 개인적인 사유로인해 일의 대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하는 방식은 잘 바뀌지 않는다. 특히 직급이 올라가고 연차가 높아질수록 한번 몸에 벤 일하는 방식은 결코 쉽게 바꿀 수 없다. 또한 일의 대상에 집착하다 보면 결국 그 일 밖에 못하는 직원이 되거나 그 일이 조직 내에서 필요하지 않게되면 어떤 일도 제대로 못하는 직원으로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방법을 사회 초년 시기에 제대로 배워야 한다.
일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일의 대상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배운 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내는 것 그것이 숙련이다. 일의 경중을 떠나 시행착오를 거치고 타인의 도움을 받더라도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내는 역량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 폼 나는 일만 쫓다가는 평생 일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주변만을 겉돌게 된다. 멋져 보이는 일은 당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며, 폼 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은 일에 대한 책임 유기에 가까운 행동이다. 결국 나이가 차고 연차가 올라도 제대로 해낼 줄 아는 일이 없기 때문에 조직은 여전히 당신에게 잡다한 일이나 임시적인 일을 맡길 수 밖에 없게 된다.
조연이라 생각했던 마동석씨가 주연이 된 영화 ‘범죄도시’가 큰 인기다. 그의 인터뷰에서 ‘묵묵히 해 나갈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도 단역의 시절이 있었을 테고 조연의 시기가 있었을 테다. 그 과정을 거쳐 주연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어떤 영화든 주연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실화를 영화로 옮겨 큰 감동을 주었던 “아이캔스피크”에서주연으로 연기하신 나문희 같은 명연기자 분도 길고 긴 과정을 거쳐오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각자가 주연처럼 연기해온 조연과 단역, 감독 같이 일하는 스태프가 있었기에 천만 영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회사의 일도 그런 것이다. 각자의 지식과경험, 직관에 의해 일의 경중이 다를 뿐 각자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그 중에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하찮아 보이고 표나지 않는 일들도 많다.
그런데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마라. 세상에 무의미한 일은 없다. 회사 내에서도 불필요한 일은 없다. 만약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조직이 잘못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보라. 그러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소소한 일이라도 그 일을 제대로 해결해내는 당신을 상사가, 경영진이, 세상이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