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도쿄역 JR선에서 가마쿠라로 가는 요코스카 선(JO 横須賀線)을 탔다. 전차 안은 만원이었는데, 일본에선 대부분 경로 우대를 잘 안 해주니 빈자리가 나면 얼른 앉으라고 엄마한테 귀띔해 드렸다. 요코하마(横浜)를 지나자 겨우 자리가 나 엄마랑 앉았는데, 아기를 앞으로 앉힌 젊은 엄마가 짐을 들고 탔는데도 아무도 자리를 내주지 않아 내가 자리를 양보했다.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우리가 내릴 때도 연신 인사를 했다. 젊은 커플들이 꽁냥이며 꿈쩍 않는 모습을 보자니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그래도 착하구나 싶었다.
가마쿠라 역에 내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11년 전,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남편과 들렀던 곳인데, 역 주변이 아주 말끔히 정비되어 있는 거다. 코인라커를 찾아내 짐을 욱여넣었는데, 동전이 모자라 역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야 했다. 일본 동전은 총 6종류인데 그중에서 100엔짜리 동전은 많을수록 좋다.
에노시마에 있는 숙소의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가마쿠라 역 근처에 있는 신사에 다녀오기로 한 거다. 그곳으로 가는 길인 ‘코마치 토오리(小町通り)‘ 는 그야말로 먹자골목이다.
다양한 과일을 말린 건과일 시식대 앞에서 엄마에게 과일 이름을 가르쳐 드리며 하나씩 맛을 보는데 당이 충전됐는지 둘이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일본 전통 공예품 매장 안에 들어갔다가 그 아기자기함에 정신을 뺏겨 벌써부터 지갑을 열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엄마! 그냥 여기선 물건들만 보자고욧!!
길 끝에 위치한 신사는 11세기에 건립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로, 전쟁의 신인 ‘하치만’을 섬기는 신사여서 12세기 가마쿠라 막부의 중추가 되었다. 일본의 중요문화재인 본궁을 보려면 61개의 커다란 돌계단을 올라가야 해서 우리는 아래서 올려다보기로 했다. 계단 왼편에 ’잠복 은행나무(隠れ銀杏)‘라는 별명이 붙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로 미처 가보질 못했다.
그런데 ‘하배전(下拝殿)’이라 불리는 춤추는 무대(舞殿)에서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어 다른 관광객들과 진귀한 구경을 했다. 남편과 왔던 때는 아이들의 성장 축하날인 시치고산(七五三) 때여서 예쁜 기모노를 입은 아이들을 봤었는데 이번엔 전통 혼례식을 직관한 거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물로 씻으면 학과 거북이가 나타난다는 돌이 있는 ‘츠루카메이시(鶴亀石)’도 미처 보질 못하고 곧바로 ‘겐지 연못(源氏池)’으로 갔다. 연잎이 가득 자라 있는 이 연못 한가운데 인공섬엔 7복신 중 하나인 비파를 치는 ’벤자이텐(弁財天)‘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
겐지 연못 맞은편에 헤이케 연못(平家池)이 있고 그 가운데 무지개다리 모양의 ‘태고교(太鼓橋)’가 놓여있다. 겐지와 헤이케 연못을 모두 일컬어 ‘겐페이노이케(源平池)’라 하는데, 겐지와 헤이케 두 가문은 헤이안 시대 말기를 호령한 양대 황족 집안이다. 두 가문의 전쟁(겐페이 전쟁)으로 결국 헤이케는 패배하고 겐지가 전국을 장악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한다. 헤이안 시대의 궁녀이자 작가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는 미나모토(源 겐지) 가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마쿠라 역 근처의 니노도리이(二の鳥居)까지 죽 이어진 참배길인 ‘단카즈라(段葛)‘를 따라 걸었다. 이 길은 차도보다 한층 높은 보도로, 봄에는 벚꽃이 활짝 핀 꽃길(하나미치 花道)을 이루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도 한다.
일본의 신토인 신사 앞에는 붉은색 토리이(鳥居)가 세워져 있는데,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이기도 하다. 한자 대로 풀면 새가 머무는 곳인데, 우리나라의 솟대를 연상시킨다. 이런 이야기들을 엄마랑 도란도란 나누며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