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손에는 커다란 두루마리 화장지 한 롤이 들려 있었다.
"이렇게 식기를 정리해 주신 분은 처음이세요. 너무 감동입니다.
저희가 따님을 위한 아이스크림을 서비스로 드려도 될까요?"
손을 심장 위로 올리는 제스처와 함께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 감동... 감동이라니......
자식들의 눈에 거슬렸던 엄마의 행동 덕분에 환대를 받는 날이었다. 아이는 냉큼 메뉴판의 딸기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기대하며 흥얼거리는 아이의 모습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나열해 보았다. 불안과 평화가 오가는 미묘한 느낌이었다.
호수가 그림처럼 드리워진 산책길이었다.
평일이었기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넓은 호수를 품고 있는 둘레길에는 여린 잎과 봄꽃이 피어나 더욱 아름다웠다. 한발 한발 길을 걷기 시작하니 마음도 호수를 따라 잠잠해지는 듯 했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어'라며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꽃피는 봄이면 더욱 외출을 하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한 묘수가 필요했다. 가고픈 곳은 정해져 있으나 반기는 사람이 없는 곳. 비슷한 모습이라도 찾고 싶었다. 이 길을 걷는 동안만이라도 엄마에게 그곳이 잠시 잊히기를 바랐다. 반기는 사람이 없는 엄마의 병은 때때로 소름 끼치도록 삶과 닿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엄마는 뭐가 그리 급한지 저만치 앞서 가셨다. 아이가 할머니를 부르고, 따라 달려보기도 했지만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은 잠시 뿐이었다. 그렇게 밀당하듯 거리를 두고 걷고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길가에 있는 비타민 음료를 발견했다.
엄마는 그 음료 하나를 얼른 손으로 들어 올렸다. 목이 마르니 마셔야겠다는 엄마를 말렸다. 막무가내 행동을 말리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 사람들이 본다고, 이건 공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먹는 간식이라고,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을 해본다. 이내 큰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가슴을 후벼 파는 말들을 내뱉으신다. 하고 싶은 것 못하게 하니 서운하고 억울함이 가득했다. 조금 전 손녀와 함께 평화로운 호숫길을 산책하고 있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엄마의 모습, 어떤 것이 진짜 엄마의 모습일까.
가던 길은 멈춰졌다.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섯 살 딸아이 마음을 살폈다. 주절주절 딸아이와 마음을 주고받았다. 놀랐을 아이의 마음을 달래며, 모든 것이 산책에 나설 때 마실 물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돌렸다. 엄마의 마른 목을 축이면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주 단순하게.
돌아오는 산책길, 가장 먼저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먹기 시작하니 예상보다 양이 많았다. 엄마의 목마름과 허기를 모두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육체의 허기와 함께 마음의 허기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엄마가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을 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허기 탓이라고, 그러니 뭐라도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식사 후 장소를 가리지 않는 엄마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순댓국집과 갈빗집, 카페 등이었고 오늘은 그 무대가 레스토랑이 된 것이다. 엄마의 식기 정리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니 자식들이 조금 민망해도 기다리자 했다. 말하자면 허용범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오늘 이 모습을 보고 속삭이던 직원의 말에 <감동>이란 글자가 없었다면 가차 없이 허용범위에서 제외될 수도 있었겠다. 아픈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은 통제라는 감옥 속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치매를 앓고 있기에 통제를 받는 것은 안전을 위해 당연한 것일까? 엄마에게 딸의 존재는 감옥이어도 안전을 위한다면 괜찮은 것일까?
시원하게 뚫린 호수와 하늘이었다. 뜻밖의 선물에 마음의 긴장이 풀어진 뒤였다. 레스토랑의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로 길게 쭉쭉 뻗은 나무들은 외국의 어느 곳 못지않았다. 아이의 입으로 들어가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몇 번 받아먹으며 달콤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의도는 여전히 곱구나, 그 진심이 닿는 곳은 있구나. 조금 전에 겪었던 비타민 음료 사건은 기억 저편으로 넘어간 듯했다. 엄마의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쉬고, 출렁이는 다리를 왕복으로 건넜다. 엄마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빨라서 손녀의 작은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당당해 보여 좋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여전히 잘 걸으시니 참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엄마가 건강할 때 더 많이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함께 다녀야지 생각했다.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유쾌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날 거라는 믿음을 꿀꺽 삼켜버렸다.
엄마는 출렁다리처럼 흔들리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흔들리는 바람과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출렁이는 다리 위. 온정의 손길은 사치가 되어버린 날카로운 칼날 위. 그럼에도 꿋꿋하게 성실하게 전진했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걸음 한걸음을 떼었을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않았을까,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무슨 이유로 사랑과 성실은 멈추지 않았고, 쉬어가는 방법 또한 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가슴 한편이 시렸다.
'엄마, 그래서 지금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여전히 고요한 호수 둘레길. 우리는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들렀다. 이제 피곤한 아이는 차에 타면 곯아떨어질 것이 뻔했다. 엄마도 차에서 한숨 주무실 것이다. 고요가 이어질 차 안을 상상해 보았다. 아이를 먼저 챙기고 나도 화장실에 다녀오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저만치 엄마가 앞서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가고 계셨다.
씩씩하게 걸음을 재촉하며 걷는 엄마를 보니 실소가 번졌다.
엄마의 손에는 공중화장실에서나 쓰는 커다란 두루마리 화장지 한 롤이 들려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