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erson, 2016
아마도 창조주는 나를 만드실 때, 성실과 근면, 끈기 같은 것은 깜빡 하셨던 모양이다. 개미와 베짱이 중에선 확실히 베짱이가 되고 싶고, 토끼와 거북이 중에서라면 아무래도 토끼의 역전패가 더 아깝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의무교육기간 동안의 내 통지표에는 그 흔한 ‘성실한 태도’, ‘규칙적인 생활’ 같은 표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대신 사교적이고, 창의적이며 능동적이라는 말들이 나를 채웠다.
어쩌면 권태기에 빠진 선생님이 ‘목소리의 크기’나 ‘수다의 빈도’같은 것을 기준삼아 교실 아이들을 반으로 갈라 이쪽은 성실파로, 저쪽은 사교파로 정한 뒤, 나름대로 긍정적인 형용사를 단순나열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자기애가 강한) 어린애의 인격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자신에 대해 반복적으로 기술된 표현과 사랑에 빠지고, 한 번도 듣지 못 한, 예컨대 성실과 끈기 같은 것 들은 재미없고 덜 매력적인 지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기, 성실과 규칙으로 도배된 통지표를 받았을 법한 남자가 있다. 그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기상하고, 매일 같은 길을 걸어 출퇴근을 하며, 매일 같은 길을 도는 순환버스를 운전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강아지와 함께 매일 같은 길을 걸어, 같은 펍의, 같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는 여가 시간에 시를 쓰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듯하다. 고작 몇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몇 날을 반복 또 반복. 그 조차도 ‘비밀 노트’에 적고 보여주지 않는, 나와 소개팅에서 만났다면 애프터 따위는 없었을,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라는 남자다.
그에게는 로라라는 아주 활기찬 부인이 있다. 그녀는 어쩐지 하루 종일 꿈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간 밤에 꾼 꿈 얘기를 시작으로, 매일 다양한 꿈으로 패터슨을 놀라게 한다. “언젠가 컵케이크 가게를 내는 꿈 말이야!”라거나 “컨트리 가수가 되는 꿈!”하면서 말이다. 멀쩡한 옷에 무늬를 그려 넣고, 가구에 페인트칠을 하고, 커튼에 구멍을 뚫어대며 내재된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는데 그야말로 창의적이고 능동적이다. 이 둘의 조합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찜찜했더랬다. 둘의 사랑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불안했더랬다. 로라로 이입되는 나에게 패터슨은 너무나 재미없는 남자이고, 패터슨에게 나는 너무나 즉흥적인 여자일 테니까.
2016년에 본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딱 성실파의 통지표 같은 무료한 영화였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러했다. 깜빡 잠들었다 깼는데, 패터슨의 화요일인지 목요일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음.. 뭐랄까 매일이 무료했다. 그런데 며칠 전 다시 본 2018년의 패터슨은 매우 알찬 한 주를 보내고 있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그는 매일 다른 승객을 만나고, 매일 다른 쌍둥이를 스치고, 틈틈이 여러 편의 시를 완성했다. 갑자기 퍼져버린 버스나, 자살소동 같은 변수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의외로 대범한 남자!!). 오히려 로라의 다소 허황된 말과 과잉된 행동이 패터슨의 잔잔한 일상 앞에서 힘없이 사그라져갔다.
내가 알고 있던 성실함의 밀도가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이를 먹어서 인지, 패터슨 같은 남자와 살게 됐기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덩어리 하나 가득,의 무게가 아니라, 작고 단단한 알맹이들이 알알이 가득이랄까. 틈틈이 눌러 담고, 꺼내 보고, 다듬던 패터슨의 시처럼, 매일의 일상을 별일 없이 살아내는 사람의 안부 속에는 남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한 알맹이들이 얼마나 가득할지, 얼마나 소중할지, 성실한 통지표를 받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어 부러울 따름이다.
#패터슨 #짐자무시 #2movies1month #2m1m #301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