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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Dec 15. 2019

[일상단편] 게으른 주말근무자의 비겁한 변명

내일의 나에게 보내는 화이팅

지금 시간이...  저녁 7시 2분. 애매하네. 

랩탑으로 인강을 듣거나,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 사이에 앉아 필요한 시간을 가늠해본다.  

7시 30분까지만 조금 쉬고, 그때부터 2시간 빡세게 하는 거야.


남은 2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내 볼까, 싶어 우선 간단하게 배를 채울 요량으로 루꼴라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에, 또 그리고 -무알콜이겠지만, 당연히- 화이트 뱅쇼도 한 잔 추가.  

주말 저녁인데도 사내 메신저 창에는 초록불이 간간이 보인다. 그 중 낯익은 이름들을 클릭하여, '주말 저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노비끼리 언제 점심이나 한번 해요' 하는 등의 자조 섞인 농담 겸 안부를 전하고 따뜻하게 데워져 나온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한다. 


최근 회사 조직에 크다면 큰 변화가 있었다. 

본사에서 한국과 일본을 North Asia라는 왠지 뜨악스러운 이름의 시장으로 합친 것이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일본 쪽이 훨씬 규모도 크고 그만큼 돈도 많이 벌다보니, 대부분 부서의 장이 일본인으로 결정되었다. 우리회사에서 제일 높다는 전무도, 요컨대 다시 상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 상사. 

근래 일본과의 외교문제도 있고, 또 우리는 한일전만큼은 질 수 없는 대한의 아들딸들이기에, 국치일이라느니 한일합방이라느니 하면서 나름의 분노로 얼마간 붕 떠있었다. 어떤 부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대놓고 일본어를 배우라고 했다더라 하는 식의 소문을, 만나기만 하면 떠들어 댔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분노라 생각했던 그 속에는 아마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의사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지, 대대적 구조조정이 있는 건 아닐까, 모든 요직을 일본인이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래봐야 이런 두려움들은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이러다가 너도나도 일본어 배우고 창씨개명 하겠다고 달려드는 거 아냐~?'하는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끝나기 일쑤였지만.  


몇일 지나고 나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의 일본인 상사는 24/7이 너무나 당연한 듯했다. 괜히 편의점의 나라가 아니구나, 싶다. 야간도, 주말도 늘 워킹모드라니. 우리가 야근 후에 보낸 자료에 대한 검토는 적어도 내일 근무시간에 회신 되어야 인간적인 것 아닌가. 내 딴에는 열심히 야근해서 만든 자료를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 바랍니다" 따위의 인삿말과 함께 보내면서  '휘유, 이정도면 내일 점심시간까진 세이프' 하고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몇 분 후 바로 수정사항이나 질문이 포함된 회신을 받게된다.  그러면 나는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자료를 보강해서 보내야 하니까, 이 지긋지긋한 자료를 오늘 적어도 한 번은 더 만지고 자야 한다는 소리다. 


그냥 무시하고 9 to 6 를 고수하기에는, 상대는 24시간 열려있는 편의점이다. 상대가 될 리 없다. 에이, 내일 하면 되지,는 통하지가 않는다. 이 상황에 이 명대사를 인용한는 것이 정말로 나도 쓰라리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거야!'는  '내일은 내일의 일이 또 올거야!'로 해석 되는 상황이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어봤자 결국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서로 멱살잡이 하는 일만 무한 반복 될 뿐이다.  


일 욕심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닥 성실한 편도 아닌데 불구하고, 일들이 이렇게 쌓여가고 있는데 집에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 꿈에서도 일하고, 일어나서는 이것이 꿈이었나 생시였나, 내가 이 일을 하기로 했던가 비몽사몽 너무 괴로운 상황의 연속이다. 이런 류의 스트레스는 내 인생 처음 겪어보는데, 그것은 아마 요즘에 내가 새로 진행하는 일이 나에게 상당히 버거운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이번 주말 역시 내내 악몽같은 쫓김에 시달리다가, 노트북만 챙겨 집앞 카페로 나온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다 문득, 까지 쓰고 시계를 보았는데, 흐억, 8시 20분! 계획한 시간에서 무려 50분이나 지나버렸다. 내일 아침까지 보내두겠다고 한 자료가 있었는데, 망했다. 분명 무알콜 뱅쇼였는데 이상하게 잠이 솔솔 오는 것이,  더 이상은 무리다. 아예 일찍 자고, 내일 회사를 일찍 갈까? 그 편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자 내일의 내가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아니, 너는 내일 늦잠을 자서 9시 출근도 간신히 할거야. 자신을 너무 믿지않는 편이 좋겠어"

그래, 그러면 딱 한시간 반만 집중해서 하고 가자. 

그런데 지금 시간이.. 8시 35분? 

아, 애매한데... 

딱 9시부터 시작할까?


추신.

하지만 결국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나 자신의 어떤 기특하고 대견한 한 부분이, 

8시 40분 이 글을 저장하는 것을 끝으로, 41분부터는 일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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