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아미, <우리 안에 불꽃이 있어>
K팝 데몬 헌터스를 필두로, 호텔 델루나, 환혼, 귀혼 등 현대판 K-판타지의 열풍이
한 차례 전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지금, 또 다른 이야기에의 갈증을 단숨에 해갈해 줄,
그러면서도 입안에 진한 향기를 남기는 환상설화집이 도착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소재의 과감함 입니다.
이무기와 산신이라는 전통적인 영물에서 시작해 한양 대화재의 불길을 지나, 경성 시대의 서늘한 뱀파이어와 근대 산업시대의 비릿한 공장 냄새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소재의 향연이 인상적이에요.
작가는 한국사의 궤적 위에 환상의 조각들을 촘촘히 박아 넣었습니다. 자칫 이질적일 수 있는 전염병과 괴수라는 소재들은 작가의 세계관 안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꿰어지며 독자를 압도합니다.
이를 실감나게 하는 건, 작가의 '맛'깔나는 어휘력입니다.
단순히 소재와 사건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면마다 감각적인 언어로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산들이 하얗게 지워졌다(141p)와 같은 문장은 서늘한 밤의 공기를 독코끝에 배달하고,
"잇꽃을 넣은 잿물" 같은 표현은 시대적 색채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구현합니다.
특히 "파도를 헤치며 괴수의 심장을 박동했다(116p)" 는 대목에 이르면, 활자는 더 이상 종이 위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가 되어 요동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수려한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 속으로 깊이 '침잠'하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합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종횡하는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이렇게 잘 짜여진 세계관과 인물을 이렇게 짧게만 소비하기엔 너무나 아깝거든요.
이 이야기들이 조금 더 긴 호흡의 장편으로 확장된다면 좋겠다 싶은 진한 아쉬움이 남는데,
독자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종류의 결핍인 셈이죠.
익숙한 설화의 재해석을 넘어, 한국적 판타지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아름다운 어휘에 취하고 싶은 이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문득 낯선 환상의 세계를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