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아수라장을 만들어 놨잖아.

최소여의 오늘 본 영화

by 최소여의 모험

킬빌 : 더 홀 블러디 어페어 | Kill Bill : The Whole Boody Affair | 쿠엔틴 타란티노 | 2006

★★★★★

"보기엔 미쳐 날뛴 것 같지만, 모두 순서대로 정돈돼 있어."

_<킬 빌 Vol1> Chapter 2, '피투성이 신부(The Blood-Splattered Bride)' 중.


네, 그게 바로 <킬 빌>의 묘미입니다.

이 대사는 극 중 '데들리 바이퍼스'의 잔혹함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자신을 향한 가장 완벽한 메타비평이기도 합니다.

엘페소의 처참한 학살 현장을 둘러보던 보안관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타란티노 무비의 정수.

"솜씨가 노련해. 아주 깔끔하게 아수라장을 만들어놨잖아."


실제로 타란티노는 킬빌을 두고

“내 상상력, 내 자아, 내 사랑, 내 열정, 내 집착에서 나온 다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궁극의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라고 평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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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②

킬빌은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지죠

근데 특이하게도 챕터 1의 제목이 ② 이고, 두번째 제거대상인 버니타 그린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챕터이기도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완벽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챕터에 비해 소박(?)하고 짧은 편이지만,

버니타와의 1:1을 통해 킬빌의 전체적인 컨셉을 소개하거든요.

키도의 이름을 삐- 소리와 함께 ***로 표시하는 듣도 보도 못한 떡밥이라거나
Ironside가 들리면 키도의 복수버튼이 눌린다는 특이점도 여기서 알게 되죠.


버니타의 딸인 니키 앞에서의 키도의 쿨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도 알게되죠.

나중에 네가 커서도 분이 안 풀리면, 찾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 대사는 키도가 단순한 살인귀가 아니라, '복수의 도'를 아는 무사임을 보여줍니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굴레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결투의 근본임을 아는 무사의 의지가 이 첫 챕터에 녹아있죠.

앞으로 키도가어떤 싸움을 해나갈 것인지도요.

모름지기 무사란, 결투에 임할 때 적을 쓰러트릴 생각에만 전념해야 한다.
인간의 일체 감정과 동정심은 억누른 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이 신이나 부처라 해도 무조건 없애라. 그것이 결투의 근본이다.



Death List Five

이 영화엔 재밌는 조직 Squad 가 여럿 나옵니다.

오렌의 호위부대 ‘Crazy 88’ (88인은 아니라고하니, 88년생들이라서일까요?),

실제 록밴드가 출연한 The 5,6,7,8’s.

킬빌 데들리바이퍼스.png

하지만 역시 백미는 Deadly Viper Assassination Squad. 근데 이 그룹 코드네임 매칭이 묘하게 웃깁니다. 흑인 버니타는 키도의 코드명인 블랙맘바를 탐냈고,

독 없는 뱀 ‘캘리포니아 마운틴 스네이크’인 엘은 정작 독을 써서 파이메이를 죽입니다.

사막에 사는 ’사이드와인더’ 버드는 유일하게 키도가 직접 복수하지 못한 인물이지만,

대신 엘이 돈가방에 챙겨온 진짜 블랙맘바에게 물려 죽죠. 블랙맘바는 키도의 코드네임이기도 하고요.

여기서 가장 무릎을 치게 만드는 설정은 이들의 수장인 빌의 코드네임이 Snake Charmer라는 점입니다.


말그대로 피리를 불어 뱀을 조종하는 술사 잖아요. 빌은, 실제로 피리를 잘 불고요.

어릴 때 엄마가 밤에 피리불면 뱀나온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묘하게 웃겼어요.


death list five.jpg

아, 그리고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빨간펜”으로 작성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키도의 Death List Five가 참 재밌어요. 펜 색깔 바꿔가면 이름 쓰는 키도 무엇…?

외국에서도 빨간펜으로 이름을 쓰는 것이 복수의 시작인가요..ㅎㅎ


Playlist

디테일에 집착하는 타란티노의 미학은 음악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5분도 못 버틸 것"이라는 오렌의 도발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청엽정 전투.

흥겨운 라틴리듬의 <Don’t Let me be Misunderstood>가 흐르고,

각성한 키도에게 오렌이 “아까 조롱한거 사과할게”라고 말하고 그 사과를 키도가 받아들이기까지

걸린 시간이 딱 4분 50초입니다.

키도를 제대로 된 상대로 인정하게 되는 서사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었죠.

킬빌 청엽정.png

뒤이어 흐르는 <修羅の花 (수라의 꽃)>은 70년대 일본 영화 <수라설희>의 삽입곡입니다.

<킬 빌>의 오렌 이시이 캐릭터는 70년대 일본 영화 <수라설희>의 주인공 '유키'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죠.

단순한 악당의 죽음이 아닌

싸움과 복수가 멈추지 않는 지옥에서 피어난 비극으로서 오렌 이시이의 마지막에 대한 예우이자,

70년대 일본영화에 대한 타란티노의 헌사라고 느껴집니다.


경지를 넘어선 덕질은 예술이다.

자타공인 '영화광'인 타란티노. 이 영화는 그야말로 타란티노의 '덕질' 집대성입니다.

취향을 숨기지 않아요.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보이죠.

브루스 리의 노란 트레이닝복, 홍콩 무협 영화의 동작, 본 찬바라 영화의 과장된 혈흔, 마카로니 웨스턴,

거기에 애니메이션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파편들을 자기만의 리듬으로 재조립해

'타란티노라는 장르'를 새로 썼습니다. (어쩌면 키도의 발가락마저도 취향...)

B급인척 하는 S급 감독이라는 타란티노에 대한 평가 역시 다시금 끄덕이게 됩니다.

네, 덕질 역시 전문가가 하면 예술이 됩니다.


이번에 재개봉한 <킬빌 : 더 홀 블러디 어페어>을 보러 갈 때,

키도처럼 나만의 'Death List' 혹은 'Must-See List'를 적어볼까봐요. 빨간색 펜으로 말이죠.

영화관 문을 나설 때쯤엔, 스트레스 따위 오렌 이시이의 정수리(?)처럼 시원하게 날아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