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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Apr 14. 2023

고양이의 방탕함 <캐시와 기숙학교>

8


어느덧 기숙학교에 온 지 삼 년이 지났다. 캐시에겐 지옥에서 또 다른 지옥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부모에게 불편함은 없는지, 건강은 어떤지, 가지고 싶은 물건이나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자주 편지가 왔으나 제대로 된 답신은 하지 않았다. 키티는 키에르는 어디에 있는지, 생사여부는 알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만 써서 보냈다. 부모는 그에 대한 대답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걱정과 우려에 가득 찬, 사랑을 듬뿍 담은 내용만 보냈다. 밤마다 콜록거리는 카셀등과 검은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광택이 나는 가구들은 먼지 하나 없이 반짝거렸다. 바닥부터 벽, 캐시의 방 창틀까지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는 기숙학교처럼 여자란 반짝이고 관리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캐시에게 주어진 삶은 항상 누군가의 통제하에 명령받고 움직이며 유행에 민감하고 남녀의 일을 구분 지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우며 가까이서 보면 다이아몬드처럼 변하지 않고 빛나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흠이 없어야 하며 하물며 있다 한들 앞에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삶은 그러했다. 미래가 오기도 전에 결정되어 있었고 상상할 필요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학교 친구들은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궁극적인 삶의 의미이자 목표였다. 결혼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버림받고 집에서도 내쳐질 운명이었다. 제대로 된 직업도 구할 수 없었다. 가끔 똑똑한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자처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된 돈을 벌기 힘들었고 사회적 지위도 낮았다. 이런 상황에 캐시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 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녀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정해진 미래를 벗어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만 품었을 뿐이었다.

하늘이 청명하고 맑은 날이었다. 점심식사를 끝낸 여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옆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오크나무에 간신히 붙어있는 잎사귀가 떨어지고 있었다. 방문을 벌컥 열리면서 옆방의 세브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한 손엔 머릿기름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다른 손엔 빗을 들고 있었다.

"캐시, 뭐 하고 있어? 너도 빨리 준비해!"


세브린이 산발이 된 붉은 곱슬머리를 빗으며 기대에 찬 어조로 말했다.


"오늘 예배 때 그 잘생긴 목사님이 오시잖아. 자크라는 목사님 말이야!"


"그래? 난 관심 없어,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어."


세브린은 캐시의 침대에 앉아, 캐시의 금발 머리에 올리브로 만든 오일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해도 너도 막상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캐시, 빨리 머리부터 빗자!"


캐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떨어지는 오크나무 잎사귀를 응시하고 있었다. 캐시의 방은 3층에 자리하고 있었고 창가 밑으로 떨어지는 물건들은 모두 망가지거나 쓸 수 없었다. 떨어진 잎사귀는 온전하게 안착했을 것이다. 무거운 것들은 견디지 못하고 가벼운 것들은 살아남았다. 무게를 덜어내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잎사귀는 살아남았다.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어낸 금발의 머리카락도 조용히 살아남을 것이다.


준비를 마친 캐시와 세브린은 예배당으로 걸어갔다. 세브린의 성화에 못이겨 코르셋을 힘껏 조이고 가는 길에 마주친 여학생들은 붉게 물든 뺨을 감추지 못하고 흥분에 가득 차있었다. 길고 곧게 뻗은 예배당 의자에 앉아 선생님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시간은 두 시였으나 삼십 분 전부터 와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세브린의 말로는 이 지역에 있던 주정뱅이들의 손에서 술을 빼앗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가게 했으며 불경스러운 말이나 폭행을 일삼던 불량배들을 고쳐 주님께 인도하는 성령의 이름으로 역사를 행하는 목사였다.


두 시 십 분 전이 되자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캐시는 그 사람이 키에르인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를 초청한 선생님들 또한 경의에 찬 눈빛으로 키에르를 바라보며 찬양하고 있었다. 자크 목사가 등장하자마자 학생들은 총명한 눈빛으로 집중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잠에서 깨워 영을 일으키고 거룩한 주의 나라를 살도록 이끄는 떠오르는 젊은 목사가 키에르였다. 단상에 선 그는 한층 더 돋보였다. 윤이 나게 손질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자매들이여, 우리는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주님께 앞으로 나아가기 전 죄를 미워하고 버리며 그분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경건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악하며 죄를 짓는 존재이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위해 결심 해야 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사력을 다하듯이 한 단어마다 힘을 주며 설교를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나왔으며 호흡이 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브린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두 손을 그러모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설교 내내 자신감이 찬 어조로 때로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며 목에 푸른 핏대를 세웠다. 단상 위에 올려져 있는 크고 긴 손가락은 모두 다섯 개였다. 네 개였던 손가락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의 손 자체가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다섯 손가락으로 성경책을 넘기며 십자가를 가리켰다. 경건하게 손을 들어 축복의 말도 건넸다. 캐시와 도중에 눈이 마주쳤을 때 언뜻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착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설교엔 흔들림이 없었다. 찬송을 부르다 어떤 학생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지자 잠시 설교를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에 손을 짚어보고 부축해 주며 선생님에게 물을 한 잔 받아 손에 쥐어주었다. 금세 일어난 학생은 그럼에도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간신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키에르의 손이 닿은 자신의 이마를 손에 짚으며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키에르는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찬송을 부르며 설교를 이어갔다. 다정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은 키에르였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히브리서12: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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