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_김소영 에세이] 읽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요즘 아이에게 바라는 게 많구나...'
아이가 내 뜻에 맞게 움직여 주지 않으면 부쩍 언성을 높이는 일이 많아졌다. 아이는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마음 가짐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내가 아무리 재촉하고 빨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을 해도 느긋한 마음은 여전하다. 성격이 좋은 건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가끔 헷갈린다. 다만 해가 거듭할수록 내 조급한 마음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어린이가 행동이 느린 것은 당연한데 어째서 나는 그 일로 늘 화를 내는 걸까?
내가 화를 내는 횟수가 점점 많아질 때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때쯤 타 지역 도서관에서 김소영 작가의 강의가 있어 ZOOM으로 참여했었다. 이사 온 직후 여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 정리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결국 작가님 책을 다 읽지 못하고 강의에 참석했다. 컴퓨터 화면으로 보이는 작가님의 인상과 목소리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책에서 만난 글만큼이나 순수하고 다정한 인상을 가진 분이셨다.
'우와! 이렇게 멋진 생각을 가진 어른도 있구나! 나도 이런 마음으로 어린이를 대하면 좋겠다.'
작가님의 글과 부드러운 음성, 온화한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꼭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에게 다정하게 이야기하자! 마음을 먹을 순 있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실천하기란 나에게 어려운 숙제 같았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는 아직 어리니 욕심부리지 않고 기본적인 생활에만 충족하면 만족하고 크게 화내지 않았다. 올해 학교를 입학한 뒤부터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이전보다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계속하고 있었고 내가 정해 놓은 목표에 아이가 다다르지 못하면 버럭 화를 냈다. 이런 나날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학교를 보내고 난 후 혼자 남은 시간에 아이에게 화낸 일을 후회하고 그러지 말자고 다짐한다.
'집에 오면 꼭 안아줘야지, 그리고 화내지 말아야지.'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어린이라는 세계_김소영 에세이]
혼자 자책을 하고 있을 쯤이면 이 문장이 내 마음에 턱 하고 걸렸다. 어린이가 느린 것은 당연하다 작은 손, 작은 몸으로 서투르게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겐 왠지 일부러 꾸물거리며 시간을 끄는 것 같고 답답해 보인다. 내 일상은 정말 정신없이 바쁜가?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게 정신없이 흘러간다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를 강압적으로 지도하면 어른은 편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어린이는 어른의 말을 쉽게 거부할 수 없으니까!
아이를 혼내고 나면 아이는 더 나에게 와서 안기고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럴 때 보면 엄마를 향한 아이의 사랑은 절대적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한다. 아이는 한참을 혼나도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와서 사랑을 확인하고 표현하지만 나는 아이가 내 말에 순종적으로 따랐을 때 안아주고 예뻐해 준다. 이런 식의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화를 내서 아이를 통제하는 일은 아이뿐 아니라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다 걸 나는 매번 알아차리곤 또 아이에게 화를 낸 것을 후회한다.
"요즘 아이들은 놀 시간이 없다" "친구가 없다" "게임만 한다"고 한탄하는 어른들도 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어린이들 입장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과 환경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어린이들이 놀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내고 친구를 불러내고 일을 만들어 내면서, 어린이들은 논다.
[어린이라는 세계_김소영 에세이]
아이가 일곱 살 때부터 아침 습관을 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당연히 학교에 입학하면 자연스럽게 정해 놓은 루틴대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아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아침 등교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 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결국엔 버럭하고 말았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습관을 들인다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매일 연산 학습지 2쪽과 영어 듣기를 도와준 뒤 겨우 등교시간에 맞춰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 늦게 가면서 까지 아침 학습을 강요해야 할까?'
'하지만 이렇게 꾸준히 하다가 어떤 날은 안 하면 아이가 이건 중요한 학습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매일같이 이런 마음이 들쑥날쑥 널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보니 아이는 정말 놀 시간이 없다. 작년 겨울에는 입학 준비를 한다고 유치원 마치고 집에 오면 간단한 한글 학습을 하고 책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입학만 하면 일찍 끝나니 여유가 생길 거라고 아이를 달랬다. 웬걸 생각보다 학교가 늦게 끝난다. 아이가 다니고 싶어 하던 학원까지 다녀오고 나면 아이는 유치원 다닐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부터는 나에게 '여유'라는 마음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나와 함께 있을 때조차 노는 시간보다는 학습을 위한 시간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이 입장이 아니라 엄마 입장에서 최소한의 학습이라고 생각하지만 고작 8살 아이에게 너무 큰 학습 부담을 안겨 주는 건 아닐까. 하면서도 이왕 시작한 학습인데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도 당연히 시중을 든다. 이게 더 어렵다. 외투를 벗을 때처럼 입을 때도 양팔을 동시에 소매에 끼워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혼자 입을 때처럼 한 팔을 먼저 끝까지 넣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쪽을 끼울 때는 팔을 접고 끙끙대게 마련이라, 시중을 드는 게 오히려 어린이를 불편하게 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 앞으로 가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한다.
"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건 네가 언젠가 좋은 곳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해서야. 어쩌면 네가 다른 사람한테 선생님처럼 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 이거 연습해 보자."
어린이는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양팔을 조금만 뒤로 하고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옷을 끼워 준다. 스르륵, 탁. 부드럽게 옷 입기가 끝나면 매무새를 손질하느라 그러는지,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지 어린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어린이라는 세계_김소영 에세이]
나는 작은 일에도 버럭 화를 내면서 정작 내 아이가 밖에 나가 어린이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나는 아이에게 한 인간으로서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있을까?
나는 나를 계속해서 점검하고 들여다본다. 마음먹은 것처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아 늘 모자란 엄마라고 자책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책의 문장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돌아본다. 아이를 존중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어른이고 싶어서...
아이가 8살이면 엄마 나이도 8살이다. 나는 아이의 엄마로서 조금씩 성숙해지는 중이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엄마의 마음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성잘 할수록 나 또한 그만큼 성장해 나간다. 내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 누구도 아닌 아이에게서 배운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사랑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이를 기다려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