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2. 그녀와 함께, 나만의 방향으로

무계획과 계획의 충돌 사이

by 남해바다

어느 해 12월, 인천공항.

찬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나는 반소매와 반바지, 그리고 크록스 한 켤레만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겨울의 무게는 공항에 두고 가기로 했다. 세탁소 대신 출입기자실 한켠에 옷가지를 툭 던져두고, 그렇게 그녀와 나는 이번 여행의 첫 장을 펼쳤다.


그녀와 나는 각자 따로 끊은 항공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방콕에 들어가 푸켓에서 나오는 일정만 정해진 상태. 그 사이 어디를 거칠지, 어느 길을 따라갈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직 몰라요. 가면서 생각해보려고요.”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눈빛 속에는 당황과 불안이 얇게 섞여 있었다. 내 말 속의 ‘무계획’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듯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자마자, 그녀는 가방에서 푸켓 여행 가이드를 꺼냈다. 단정히 접힌 책갈피, 형광펜 자국. 그 책은 그녀가 얼마나 이 여행을 준비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펼쳐볼 생각이 없었다. 책 없이도 충분하다는 생각은, 여러 나라를 떠돌며 내 안에 자리 잡은 하나의 확신이었고, 계획보다는 흐름에 몸을 맡기겠다는 오래된 습관이기도 했다.


예전에 유럽을 여행할 때, 나도 책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책 속의 장소들은 늘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중 절반은 같은 책을 든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 책을 어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 순간부터 내 여행은 달라졌다. 지도가 아니라 발길을, 정보가 아니라 기척을 믿기로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조용한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끌어안고 가야 했다. 푸켓은 그녀가 손꼽아 기다려온 목적지였다. 나는 그 기대를 흩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푸켓으로 살며시 방향을 잡았다. 가다가 어디든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열어둔 채.


밤 11시, 방콕 수완나품 공항.

긴 비행 끝에 도착한 그 밤, 그녀와 나는 여전히 숙소를 정하지 못한 채 공항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오산 로드로 이동하기엔 너무 늦었다. 나는 내일 아침 7시 푸켓행 국내선 비행기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공항에서 밤 새우죠.”


그녀는 내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불안과 의심,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믿음이 얽힌 눈빛. 어디로 끌려가는 걸까? 이 남자는 정말 믿어도 될까? — 그런 질문이 눈동자 속에서 쉼 없이 맴돌았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공항 구석에서 배낭을 베고 누웠다. 그녀는 배낭 끈을 꼭 진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혼자 여행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고민하게 나둔채, 멀리서 들려오는 방송 소리와 출입문 자동센서의 움직임, 낯선 언어들이 공기처럼 흘러가는 그 공간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새벽 2시.

눈을 뜨자, 그녀는 추위에 떨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너무했나 싶었다. 나는 공항을 한 바퀴 돌았고, 혼자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스타벅스를 찾았다. 따뜻한 카페라떼 두 잔을 주문하면서도 '이 돈이면 하룻밤 숙소를 잡을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비싼 커피 두 잔으로 무언가를 만회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나는 소파에 몸을 던졌고,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조용히 잠들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내 편의가 먼저였다.

아침.

창으로 스며드는 빛이 로비 바닥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번졌지만, 작은 변화가 보였다. 불편함을 견디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표정. 나는 그 안에서 배낭여행자의 얼굴을 보았다.

푸켓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버스 타죠.”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여행자들은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마중 나온 기사와 호텔로 향했지만, 우리는 목적지도 없는 버스를 찾아 헤맸다. 그녀는 표정에서는 당혹이 번졌다.


나는 늘 혼자였다. 표지판도, 시간표도 없는 길을 좋아했다. 혼자일 때는 그것이 자유였다. 그런데 그날, 나는 느닷없이 택시를 잡았다. 혼자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 그 순간, 내가 지켜온 원칙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아직 누군가와 발맞춰 걷는 동행이라 부르기엔 멀었고, 누군가를 위해 속도를 늦추는 다정함이라 하기에도 부족했다. 그저, 내 여행 가방 위에 낯선 짐 하나가 살짝 얹힌 듯한 느낌. 그 정도였다.


“가까운 항구로 가주세요.”


창밖 풍경은 무심히 스쳐갔다. 옆자리 그녀는 차창에 손가락을 댔다 떼기를 천천히 반복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마치 스스로를 붙잡기 위한 마지막 끈 같았다. 몇 차례 내 쪽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따라오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가까운 항구'가 어디인지, 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따라오는 그녀의 눈빛에는 막막함과 나를 향한 조심스러운 의지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회색 하늘, 적막한 항구, 내리는 비.

택시 기사는 배표를 사오겠다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뒤, 그는 젖은 티켓을 들고 돌아와 400밧을 요구했다. 나는 목적지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마치 멸치잡이 배에 팔려가는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라는 걸.